분수를 잃은 여인, ‘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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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920회 작성일 13-06-09 13:27본문
분수를 잃은 여인, ‘하갈’
창16:1~9
2013. 6/9. 08:00, 11:00
분수를 모르면 푼수가 된다.
어느 날,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먼 산에서 날아왔다. 독수리는 목장으로 내려가 작은 양 한 마리를 잽싸게 낚아채서 날아갔다. 이것을 본 까마귀는 독수리의 날쌘 행동이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까마귀는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곧장 목장으로 날아갔다. 까마귀는 어린 양들이 놀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중 가장 작은 양을 잡았다. 그러나 까마귀는 힘이 없어서 독수리처럼 양을 낚아채서 날아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그냥 날아가려하는데 발톱이 양의 털에 휘감겨 빠지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 때 양의 등에 붙어 도망치려고 파닥거리는 모습이 목동에게 발각되어 까마귀는 결국 죽고 말았다. 이솝의 우화에 나온 이야기로 자기 분수를 모른 사람의 최후를 보여준다.
속담에 ‘사주에 없는 관(官)을 쓰면 이마가 벗겨진다.’는 말이 있다. 까마귀처럼 분수를 모르면 화를 당한다는 말로 분수를 지키고 분수를 알아서 행동하라는 뜻이다. 옛 선비들은 지족(知足), 지지(知止), 지분(知分)의 삼지(三知)를 선비의 주요덕목으로 삼았다. 여기서 ‘분’(分)이란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를 말한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지분(知分)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아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무리하게 욕심내는 것, 이것이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분수를 모르면 끝없는 배고픔에 시달린다. 언제나 하고 있는 일은 만족스럽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분수를 모르면 푼수가 된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부정, 자신에 대한 끝없는 혐오, 자신에 대한 끝없는 절망, 바로 이것이 분수를 모르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시간에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날뛰다 큰 봉변을 당한 한 여인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라의 여종 하갈
본문은 ‘하갈’이라고 하는 여종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의 가정이 겪은 시련 이야기다. 비슷한 내용이 아브라함 이야기에 두 번(본문과 21장) 나온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몇 번 자손 약속을 하셨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그들에겐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둘 다 나이는 들어가고 자녀를 생산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스스로 방법을 찾았다. 처음엔 자식 이상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다(15:2).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15:4). 그러자 이번에는 사라가 자신의 몸종 이집트 여인 하갈을 씨받이(대리모)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에 대한 사라의 자의적 해석의 결과이다. 누구의 몸으로 낳든 아브라함의 씨가 되니까! 아브라함도 동의했다(2).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했고, 그녀가 곧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하갈이 자신이 주인의 자녀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임신치 못하는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였다(4). 임신을 하고나니 몸종이 아니라 주인의 아내가 된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한 마디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게 행동을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평화롭던 가정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일로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게 되었고(6),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못 이겨 임신한 채로 아브라함의 가정을 뛰쳐나가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매서운 시련의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다.
불행은 분수를 모른데서 시작되다.
아브라함 가정에 불어 닥친 시련의 바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 즉 분수를 모른 행동이 가져온 결과다. 우선 사라가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이루고자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2절을 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여기서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는 사라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라 자신의 판단이고 해석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언급도 하시지 않았는데, 스스로 판단해서(“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행동하는 것(“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이것이 분수를 넘어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는 어리석음이자 교만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스스로 제한시키는 불신앙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 사라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보게 되면 분수에 어긋나는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신앙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되고, 분수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삶으로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라의 이 어리석음과 교만, 불신앙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었고(5,6), 훗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의 불화(21:9), 나아가서 오늘날 중동문제,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 한 개인의 분수에 지나친 어리석은 행동이 이와 같이 뿌리 깊은 불행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다음은 하갈이다. 하갈이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해 아브라함 가정에 풍파를 일으켰고, 고단한 인생의 광야를 건너야 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하는지라.”(4).
지혜롭고 된 사람, 수준이 있는 사람은 가질수록, 많이 가질수록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더욱 겸손히 자신을 낮춘다. 오히려 가지지 못한 사람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여 더욱 조신하게 처신을 한다. 그러나 어리석고 못된 사람, 수준이 낮은 사람은 사소한 것만 가져도 그것을 드러내고 싶고, 주장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다. 하갈이 그런 사람이었다. 몸종으로 살다가 여주인의 배려로 주인의 대리모가 되어 주인의 자녀까지 잉태하게 되었으니 더욱 몸을 낮추고 여주인에게 순종했어야 했다. 그런데 하갈은 가진 사실 때문에 교만하여 여주인을 멸시하게 되었다.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대리모는 신분상승의 기회였다. 함무라비 법전이 형성된 이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회에서는 몸종의 ‘평등관습법’이라는 것이 전래되고 있었다. 이에 의하면 몸종이라도 그 여주인의 허락아래, 그리고 대를 잇는다는 목적이면 여주인 남편의 ‘대리모’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경우, 이 여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그녀를 아내로 취한 그 남자의 아내 자격을 얻게 되었다. 즉 여종에서 아내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여종이 신분이 상승하였다 하여 자기 여주인을 깔보거나 멸시하지 못하도록 이 관습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사라의 여종 하갈도 아브라함의 대리모가 되었으니 아브라함의 아내자격을 얻었고, 게다가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신분의 변화와 임신한 사실을 믿고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한 것이다. 결국 이는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사라의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학대였다. 물론 학대한 사라도 문제지만, 이것은 엄연히 하갈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다가 자초한 것이다. 불행은 분수를 모르는데서 시작되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을 가까이 한다.
분수를 지키자!(본래성을 기억하자!)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의 ‘본래성’(originality)을 기억하는 것이다. 신자의 본래성이란 ‘죄인’이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고, 주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었어도 나의 본래성은 죄인이고, 마귀의 자녀이고, 멸망의 자식이다. 이런 본래성을 기억한 사람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있다. 다윗이 평생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마감하고, 바울이 감사가 넘치는 감격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다윗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이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고,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딤전1:15)고 고백했다. 자신의 분수, 곧 자신의 본래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왕이 되었어도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곳곳에 선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놓고도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구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당시 관습법에 따르면 하갈은 대를 잇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대리모가 되었으니 아브라함의 아내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본래성은 ‘사라의 여종’이었다. 8절에서 광야를 방황하고 있는 하갈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하갈에게 바로 이 점을 확인시켜주셨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이것이 하갈의 본래성이다. 하갈이 바로 이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불행은 분수를 모르는데서 시작되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을 가까이 한다. 하갈의 인생이 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불행의 주인공으로 사느냐, 행복의 주인공으로 사느냐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면 불행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분수를 알면 행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분수(본래성)를 잘 알고, 지키고, 행동해서 행복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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