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청산과 미래번영, ‘므낫세와 에브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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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6,724회 작성일 13-05-19 13:27본문
과거청산과 미래번영, ‘므낫세와 에브라임’
창41:46~57
2013. 5/19. 08:00, 11:00
작은 원한 때문에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게 된 동기가 ‘원한’ 때문이라고 한다. 쿠르트 교수는 <유태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논문에서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게 된 동기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히틀러는 그림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화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비엔나로 가서 미술공부를 하고 싶어 미술학교에 지원하였지만 불합격을 받았다(1907년). 다음해에 다시 도전했으나 또 불합격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불합격시킨 시험관 7명중 4명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유태인 때문에 시험에서 떨어진 것으로 생각함), 유태인을 싫어하고 있었던 그에게 이 사건은 그 미움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그는 ‘나를 낙방시킨 유태인에게 보복하리라.’고 결심했다. 또한 비엔나에서 공부할 때 그는 속옷 모델과 사랑에 빠졌다. 사랑의 고백을 시로 하였는데, 그 여자가 유치하다고 비웃자 이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 그는 그 여자를 폭행했다. 그 후 그 여자는 그를 떠나 사업가와 결혼을 하였다. 그 여자 역시 유태인이었다. 그는 ‘반드시 그녀의 목을 조르고 말거야.’고 원한의 칼을 갈았다. 그래서 그는 정권을 잡자 원한을 갚기 위해 역사상 가장 무서운 민족학살정책을 시도했다. 사소한 원한이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라도 원한을 품고 있으면 자신과 타인에게 심각한 독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원한이 맺혀 쌓이면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요셉도 원한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 원한을 풀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었다. 하지만 그는 히틀러처럼 원한을 복수로 갚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결단과 각오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아들의 이름에 잘 나타나고 있다.
현재는 과거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과거의 쓴물이 고여 있고, 쓴 뿌리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덮고 살아가다가 기회가 되면 내면에 있던 것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때로는 열등감으로, 불안으로, 좌절로, 혹은 미움과 분노로, 패배감이나 죄책감 등으로 수면 위로 떠올라 현재의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마음의 평화를 해치고, 흑암 세력이 파고드는 통로를 제공한다. 사실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뿐이지 과거는 우리의 내면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시간만 지나갔을 뿐 그 기억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과거는 숨겨진 현실이고,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그러니 사람의 현재는 과거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어제를 힘들어 하면 오늘도 힘이 들고, 과거를 미워하면 현재도 미워지고, 과거 속에 가둬놓고 바라보는 미운 사람은 오늘 현재 속에서도 미워진다. 그래서 서로 과거의 감옥에 갇혀 사랑할 수 없게 된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성향, 생각, 가치관 역시 과거에 경험했던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현재의 나 또한 과거가 쌓이고 모인 존재다. 과거는 어떤 형태로든 현재의 나와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고, 현재의 나를 움직이고 있다. 히틀러의 인생이 인간백정으로 전락하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과거에 그의 마음에 심어진 쓴 뿌리 유태인에 대한 사소한 원한이 그의 현재적 삶에 영향을 주어 그와 같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과거라는 감옥에서 자유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에게는 6가지의 감옥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자기도취의 감옥, 둘째는 비판의 감옥, 셋째는 절망의 감옥, 넷째는 과거지향의 감옥, 다섯째는 선망의 감옥, 여섯째는 질투의 감옥이다. 사실 인간에는 6개뿐만 아니라 60개도 넘는 감옥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이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 사건이 우리를 이와 같은 감옥에 가두고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현재, 행복한 미래를 위해선 과거를 건강하게 처리해야 한다. 과거를 건강하게 청산하지 못하면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서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쓰리고 아픈 과거를 가진 요셉이지만 그의 삶이 형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셉은 이집트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장남의 이름이 므낫세인데, 므낫세는 ‘나솨’, 즉 ‘잊어버리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유래되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했다. 아프고 쓰린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의 아픈 기억을 다 잊게 되었고, 용서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모든 고난”이란 그가 13년 동안 이집트에서 경험한 모든 일이다. 또한 “아버지의 온 집 일”은 복잡한 가족관계(4명의 어머니와 10명의 이복형제)에서 비롯된 갈등을 포함하여 아버지의 편애로 인한 형제들의 미움과 질투, 그리고 그를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 등을 뜻한다.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들, 즉 과거의 쓴물과 쓴 뿌리는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고 도l는 일이 아니다. 힘쓰고 애를 쓸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 우리를 좌절시킨다. 그래서 요셉은 이런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님께서 잊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잊게 하셨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 아픔이 나를 좌절시키거나 절망시키지 못하도록 치유하셨다.’는 말이다. 우리 마음속에 고여 있는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키고,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친히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초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풍성한 미래를 향하여
한자어에 ‘결속과거, 개벽미래’(結束過去, 開闢未來)라는 말이 있다. ‘지난 과거를 닫고, 다가오는 미래를 열자’는 뜻이다. ‘므낫세’는 ‘과거청산’이라는 뜻으로 지난날의 아픔과 한을 모두 잊겠다는 뜻이다. 요셉이 이렇게 과거를 깨끗이 잊고,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52)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고 형통한 삶을 주셨다는 고백이자 비전이다. ‘미래의 번영’, 즉 미래에는 힘차게 뻗어나가 번영을 이루게 되리라는 뜻이다. 과거의 모든 원한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에게 미래의 풍성한 삶, 형통한 삶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과거원한→현재용서→미래번영’이라는 중요한 ‘형통의 공식’이 있다. 미래의 번영은 과거의 원한을 현재 용서하는 삶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고, 미래라는 결승선을 향해 잘 달릴 수가 없다.
생명은 과거를 끊고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시간의 연속이다. 좋은 과거든, 나쁜 과거든 과거는 이미 죽은 것이다. 생명 역시 과거에 붙잡혀 있는 한 죽은 생명이다. 과거의 죽은 시간을 정리해야 미래의 창성한 문이 열린다. 그래서 요셉은 ‘과거청산, 미래부흥’이란 뜻을 담아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고, 둘째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불렀다. 물론 현재 수고한다고 미래가 창성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한 과거든, 초라한 과거든 과거의 잡아당김을 끊고 현재에 수고하며 미래의 이끌림을 받을 때, 하나님의 창성하게 하심이 있는 것이다. 어떤 과거든지, 과거를 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고 인내하면 끝내 창성하게 되리라. 스스로 알껍데기를 깨부수고 나왔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의 주인공 고주몽은 살벌한 경쟁과 익숙한 과거의 땅 부여에서 도망쳤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강 엄수를 건너, 낯선 미지의 땅을 향해 전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전 37년에 고구려를 창건할 수 있었다. 좋든, 나쁘든 과거의 익숙한 장소, 사람, 경험을 떠나야만 새로운 미래, 풍성한 미래가 열린다.
그러므로 요셉의 인생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자기 삶에 대한 결단과 비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의 아픔과 원한을 모두 청산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그 고백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다. 오늘 우리가 잊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바라며 기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풍성한 미래로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은 과거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