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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의 영웅,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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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298회 작성일 13-05-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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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의 영웅, ‘요셉’

창50:15~21

 

용서의 사람, 요셉

 사람을 평가는 기준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크게 성공했을 때, 즉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력을 쌓고, 부자가 되고, 출세하여 힘을 갖게 되면 그 힘으로 그 동안 짓밟히고, 멸시를 받고, 부당한 대우를 당한 일에 대한 보복의 도구로 사용한다. 요셉이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성취한 것(미천한 노예에서 일국의 총리가 된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자신의 출세와 힘을 보복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위해 사용했고,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참으로 성숙한 사람, 진정한 믿음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요셉처럼 상처가 많은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도 부족할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렸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그러니 일반 사람 같으면 밤낮으로 복수의 칼을 갈았을 것이고, 자신에게 힘이 주어졌을 때 복수의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요셉에게도 그런 기회가 왔다. 하루 아침에 소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그것도 당대 초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이다. 단순히 이름뿐인 총리가 아니라 왕의 신뢰와 전폭적인 지지로 절대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총리였다(41:42~44). 그동안 자신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에게 멋지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 기회를 복수를 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잔인무도한 그의 형제들, 뻔뻔스럽게 죄를 뒤집어씌운 보디발의 아내, 10년 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의 결백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지켜주지 않은 보디발, 그리고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술 맡은 관원장, 그 누구에게도 복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쿨(cool)하게 용서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이 모두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1.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19).

2차 세계대전 때 유태인 학살의 원흉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때(1968년) 영국에 사는 유태인 중에 꼴란즈(Golantz)라는 사람이 막대한 자신의 재산을 써가면서 아이히만을 석방해 달라고 일인(一人)시위를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며 그의 석방을 주장했다. 아이히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유태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사형하지 않고 내버려둬도 인생은 다 죽듯이 그도 곧 죽을 텐데 미리 죽일 것이 없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이미 심판하셨는데 그의 몸뚱이를 죽인다고 우리에게 무슨 득이 있겠는가?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누구관대 그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더욱 감동적인 것은, 사랑이 식어지는 세상에 이 일을 계기로 이제부터라도 참 사랑을 심어가자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보다 다가오는 미래를 생각하자는 것, 불행한 과거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살맛나는 멋진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의미라 생각한다.

 

언뜻 들으면 궤변처럼 들리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맞는 감동적인 말들이다. 이런 사람이 어두운 세상, 차가운 세상을 밝히고 따뜻하게 하는 횃불과 같은 존재이고, 이런 사람이 있기에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한다. 용서만이 어두운 과거, 아픈 기억을 청산하는 일이고, 사랑이 식어진 세상에 참 사랑을 심는 일이다. 무엇보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고, 원수 갚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 안에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며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다(롬12:18). 요셉이 복수가 아닌 용서를 택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 야곱을 장사지낸 다음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찾아와 말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들을 용서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는 것이다(17). 물론 이것은 그들이 꾸며낸 말이다(15). 형제들의 이 말에 요셉이 ‘울면서’(17) 위로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죄를 묻고 그것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 즉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몫으로 자신은 형제들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이고 복수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요셉이 복수대신 용서를 선택한 이유다. 복수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실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며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였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할 일은 제쳐놓고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그가 나를 용서하든 안 하든 그것은 하나님과 그에게 맡겨야 한다. 그 문제는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윤리생활까지 내가 원망하고 탓할 것은 없다. 그래서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할 일만 잘하면 된다. 내가 할 일이란 용서하는 일이다.

 

2. 악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20).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다(롬8:28). 요셉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역경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며, 이와 같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근거하여 형제들을 용서하게 된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물론 형제들이 악한 마음을 가지고 그를 팔았지만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행동까지 선으로 바꾸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로 선용하셨다는 엄청난 믿음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새로운 가치관과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이렇게 변화된 가치관과 역사의식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해석한 까닭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셉의 변화된 가치관과 역사의식은 ‘섭리적 신앙’에서 나왔다.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보고 두려워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고백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요셉은 자신에게 행한 형제들의 만행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이집트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노예로 ‘팔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사자로 ‘보냄을’ 받은 것(Not sold but sent!)이고, 이 일을 주도하신 분 또한 형제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러니 요셉이 형제들에게 복수할 명분도 없지만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무엇인가를 위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被投性/Geworfenheit)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의 선택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을 ‘던질’(企投性/Antworfenheit)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한다(처음엔 타의에 의해 던져졌으나 이제는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자신이 누구에 의해, 무엇인가를 위해 던져진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곳)에 자신을 던질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 인간의 교화와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더욱 어두워지고 삭막해진 이유가 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진’(consciousness of Mission) 존재로 인식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복수에 자기 자신을 던지지 않고, 용서를 위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무엇인가를 위해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보내진 존재이고, 일상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이다. 이런 믿음의 고백에서 진정한 용서의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용서해야 잘된다.

어떤 분이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부인을 만나 독일에 대해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잔잔히 웃으며 ‘나는 복수에 대한 감정으로 내 인생을 파괴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가장 큰 복수, 가장 멋진 복수는 용서이다. 복수가 타인의 삶에 매달려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용서는 삶의 응어리를 풀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미국 위스콘신대 연구논문에 의하면 용서하지 못할 때 우울증, 고혈압, 위경련, 격렬한 분노, 편집증 등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나 용서하면 이런 증상이 감소거나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심리치료사들은 용서를 중요한 치료의 방법으로 활용하여 환자 스스로 용서를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용서를 선택한 그 순간 세상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삶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면 치료는 끝난 것이다. 사실 인간의 허다한 병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의 찌꺼기’가 만병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용서는 이와 같은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내가 잘사는 길이고, 잘되는 길이고, 풍성하고 형통하게 되는 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2~1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가장 성공적으로 실천했던 사람이 요셉이다. 이는 요셉이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고, 악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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