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워주는 생활(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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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430회 작성일 06-10-15 18:03본문
세워주는 생활
롬14:13-23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 후에 열정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역 가운데 하나가 해비타트(habitat) 사역입니다.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사역입니다. 몇 년 전에 진상에서 하동으로 넘어는 곳에 집을 지어준 적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며 일을 하는 카터에게 일하는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한 채의 집을 지을 때마다 단순한 빌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멋진 말이지요. 단순히 집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을 세워주는 것.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은 신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했고, 이미 4절에도 연약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한바 있습니다. 여기에 '세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입니다. 이것은 오이코스와 도메오란 두 단어가 결합한 것입니다. 오이코스는 '집'(home/house)이라는 뜻이고, 도메오는 '세운다'(build)는 뜻입니다. 카터 대통령이 집을 세우는 것이 인생을 세우는 것이라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세워주는 것은 이웃의 집을 세우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종종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이웃을 파괴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웃을 험담하거나 비방하는 것, 악평하는 것,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 무시하거나 소외시키는 것. 이는 이웃의 집에 불을 질러 태우는 방화범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웃을 허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세우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마땅히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세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서로 판단치 말아야만 합니다(13,15).
롬14:1-12까지에는 소위 신자들이 자유할 수 있는 삶의 영역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는 것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논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방세계에서 고기는 모두가 우상에게 드려진 우상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 특히 유대인 신자들에게 고기를 먹는 것은 몹시 꺼리는 문제였습니다. 아울러 이방인 신자들에게 있어선 보편적으로 자유로운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고기를 먹는 문제는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안식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의견은 신자는 모든 일에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신앙의 본질문제가 아닌 이런 자유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들로 인하여 언쟁을 하다가 신자들 간의 교제가 깨어지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열심히 교회당 건축을 해놓은 후에 갈라졌는데, 원인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커텐 색깔 가지고 싸우다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싸움이 났는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보신탕을 먹었다고 간증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이런 선교사를 계속 선교사로 인정하고 후원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동서 교회가 나뉘게 된 원인들도 보면 사소한 비본질적인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제의 수염을 길러야 하느냐 마느냐, 사제가 결혼을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등의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나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모든 비본질적 주제에 대한 논쟁들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본문 13절에서 "서로 판단치 말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이런 논쟁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로 형제를 근심케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문제인 것입니다. 15절 말씀이 바로 그 증언인 것입니다(다같이 읽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4). 왜냐하면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판단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그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상대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20,21).
14장에서 바울은 고기(우상의 제물)를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고, 그것을 먹지 못하고 대신 채소만 먹는 사람은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람들 간에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제물을 먹지 못하는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자, 혹은 믿음이 약한 자라고 비난하고, 반대로 채소만 먹는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혼합주의적인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서로 비난을 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로마 교회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던 점입니다(8:~10:). 이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결론은 ‘서로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행동기준은 믿음입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20,23). 예수님도 믿음으로 하면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자도 믿음으로, 먹지 않는 자도 믿음으로 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었을지라도 신자는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기에(19) 서로 양보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21). 그래서 바울은 평생을 고기를 먹지 안했고, 결혼도 하지 안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도 사역비를 받지 안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기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양보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양보를 해야 하느냐? 어른이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 노약자들에게 양보하고, 형이 동생에게 양보하듯, 믿음이 강한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먼저 양보를 하라(롬15:1)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양보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보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는 어른이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 노약자들에게 양보해야 하지만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적자생존, 양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보는 약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강자의 미덕일 수가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세요.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강한 자, 가진 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가치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섬김을 기초로 한 철저한 기독교 가치관에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일화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루터가 강가를 걷다가 무척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강에는 한 사람 정도 건넌 수 있는 긴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양쪽에서 두 마리의 양이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양이 강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서로 비켜갈 수도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을 만큼 다리의 폭이 좁았습니다. 루터는 양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지켜보다가 그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서로 어리둥절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조금 더 큰 양이 다리 바닥에 넙죽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작은 양이 큰 양의 등을 밟고 지나가고 다음에 큰 양이 일어나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힘있는 사람, 큰 사람이 양보하고, 엎드려 주는 것이 기독교의 미덕입니다. 나의 등을 밟고 연약한 지체들이 장애물을 건너고, 나의 등을 밟고 장애물을 넘게 하는 것. 이렇게 할 때 서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스펄전이란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골초였습니다. 한번은 심지어 그의 교회 근처 담배 가게가 선전을 하기를 "스펄전 목사님이 잘 피우는 담배를 파는 집"이라는 선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군가가 스펄전 목사님에게 전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면, 이제는 내가 담배를 끊을 때가 되었군요."라고 말하더니 실제로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교회 직원이 "목사님이 담배피우는 것이 늘 신앙의 본질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 끊기로 하였느냐?"고 묻자, "나는 상관이 없는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우게 되고 건강을 상하게 된다면 내가 삼가야 하겠지요."라고 했답니다. 20-21절의 말씀이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담배도 피울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스펄전 목사님이 담배는 피우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담배를 거리낌으로 대하는 믿음 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담배를 포기한 것입니다. 신자는 모든 일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자유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고전10:23~24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이 참으로 이웃을 세워주는 성숙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 신자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0:31).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 것인가가 아니라, 이웃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에는 언제나 강한 사람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어른들이, 인생의 선배들이, 신앙생활을 먼저 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항상 먼저 양보를 해야 합니다.
3.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17).
대부분 사람들의 논쟁의 자리에 들어가 보면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껍데기를 가지고 논하다가 열을 올리고 열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문제도 마찬가집니다. 거의 대부분이 비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어떻게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느냐. 여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게 되면 사소한 것 때문에 얼굴 붉힐 일도, 마음 상할 일도 없습니다. 사소한 실수나 차이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가치를 위해 양보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 지미카터에게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소감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통령 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대통령이 아닌 이웃사랑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분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눈물겨운 바램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해비타트운동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라는 변호사이자 사업가에 의해 시작된 운동입니다. 풀러는 나이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이혼선언을 하고 그에게서 떠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 전부인줄 아는 남편의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진지한 신앙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州)의 클래런스 조던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을 방문하여 인종을 초월한 공동체적 신앙생활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즉시 그는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곧 자기의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 자동차, 보트, 자가용 비행. 모두를 팔아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졸지에 백만장자에서 빈 털털이가 되었지만 그는 행복을 찾았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고, 마틴 루터 킹 인도주의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해비타트 관계자는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는 욕심을 버려 하나님을 만났고, 물질을 포기하여 가치를 발견했고, 특권을 포기하고 행복을 얻었으며, 자신을 버려 이웃을 찾았고, 쾌락을 버려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다." 저는 이 말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삶이요, 우리 신자가 추구해야 할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권과 물질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희생, 주님의 피 흘리심, 주님의 섬기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이웃을 세워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풀러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가리켜 '망치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망치로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새 삶을 체험한 그는 새로운 섬김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삶을 세워주는 일생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지미 카터도 사랑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집을 세우고 그들의 새 인생을 세워주는 일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이웃들을 세우기 위해 꼭 망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악수, 중보의 기도, 소리없는 미소, 변함없는 관심. 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이웃들은 새 인생의 집을 지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인생을 사모하십시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이웃이, 교회의 지체들과 교회가, 일터와 이 사회가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14:13-23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 후에 열정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역 가운데 하나가 해비타트(habitat) 사역입니다.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사역입니다. 몇 년 전에 진상에서 하동으로 넘어는 곳에 집을 지어준 적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며 일을 하는 카터에게 일하는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한 채의 집을 지을 때마다 단순한 빌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멋진 말이지요. 단순히 집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을 세워주는 것.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은 신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했고, 이미 4절에도 연약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한바 있습니다. 여기에 '세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입니다. 이것은 오이코스와 도메오란 두 단어가 결합한 것입니다. 오이코스는 '집'(home/house)이라는 뜻이고, 도메오는 '세운다'(build)는 뜻입니다. 카터 대통령이 집을 세우는 것이 인생을 세우는 것이라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세워주는 것은 이웃의 집을 세우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종종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이웃을 파괴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웃을 험담하거나 비방하는 것, 악평하는 것,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 무시하거나 소외시키는 것. 이는 이웃의 집에 불을 질러 태우는 방화범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웃을 허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세우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마땅히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세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서로 판단치 말아야만 합니다(13,15).
롬14:1-12까지에는 소위 신자들이 자유할 수 있는 삶의 영역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는 것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논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방세계에서 고기는 모두가 우상에게 드려진 우상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 특히 유대인 신자들에게 고기를 먹는 것은 몹시 꺼리는 문제였습니다. 아울러 이방인 신자들에게 있어선 보편적으로 자유로운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고기를 먹는 문제는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안식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의견은 신자는 모든 일에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신앙의 본질문제가 아닌 이런 자유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들로 인하여 언쟁을 하다가 신자들 간의 교제가 깨어지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열심히 교회당 건축을 해놓은 후에 갈라졌는데, 원인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커텐 색깔 가지고 싸우다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싸움이 났는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보신탕을 먹었다고 간증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이런 선교사를 계속 선교사로 인정하고 후원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동서 교회가 나뉘게 된 원인들도 보면 사소한 비본질적인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제의 수염을 길러야 하느냐 마느냐, 사제가 결혼을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등의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나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모든 비본질적 주제에 대한 논쟁들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본문 13절에서 "서로 판단치 말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이런 논쟁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로 형제를 근심케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문제인 것입니다. 15절 말씀이 바로 그 증언인 것입니다(다같이 읽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4). 왜냐하면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판단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그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상대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20,21).
14장에서 바울은 고기(우상의 제물)를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고, 그것을 먹지 못하고 대신 채소만 먹는 사람은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람들 간에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제물을 먹지 못하는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자, 혹은 믿음이 약한 자라고 비난하고, 반대로 채소만 먹는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혼합주의적인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서로 비난을 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로마 교회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던 점입니다(8:~10:). 이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결론은 ‘서로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행동기준은 믿음입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20,23). 예수님도 믿음으로 하면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자도 믿음으로, 먹지 않는 자도 믿음으로 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었을지라도 신자는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기에(19) 서로 양보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21). 그래서 바울은 평생을 고기를 먹지 안했고, 결혼도 하지 안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도 사역비를 받지 안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기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양보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양보를 해야 하느냐? 어른이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 노약자들에게 양보하고, 형이 동생에게 양보하듯, 믿음이 강한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먼저 양보를 하라(롬15:1)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양보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보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는 어른이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 노약자들에게 양보해야 하지만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적자생존, 양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보는 약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강자의 미덕일 수가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세요.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강한 자, 가진 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가치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섬김을 기초로 한 철저한 기독교 가치관에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일화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루터가 강가를 걷다가 무척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강에는 한 사람 정도 건넌 수 있는 긴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양쪽에서 두 마리의 양이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양이 강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서로 비켜갈 수도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을 만큼 다리의 폭이 좁았습니다. 루터는 양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지켜보다가 그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서로 어리둥절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조금 더 큰 양이 다리 바닥에 넙죽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작은 양이 큰 양의 등을 밟고 지나가고 다음에 큰 양이 일어나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힘있는 사람, 큰 사람이 양보하고, 엎드려 주는 것이 기독교의 미덕입니다. 나의 등을 밟고 연약한 지체들이 장애물을 건너고, 나의 등을 밟고 장애물을 넘게 하는 것. 이렇게 할 때 서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스펄전이란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골초였습니다. 한번은 심지어 그의 교회 근처 담배 가게가 선전을 하기를 "스펄전 목사님이 잘 피우는 담배를 파는 집"이라는 선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군가가 스펄전 목사님에게 전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면, 이제는 내가 담배를 끊을 때가 되었군요."라고 말하더니 실제로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교회 직원이 "목사님이 담배피우는 것이 늘 신앙의 본질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 끊기로 하였느냐?"고 묻자, "나는 상관이 없는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우게 되고 건강을 상하게 된다면 내가 삼가야 하겠지요."라고 했답니다. 20-21절의 말씀이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담배도 피울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스펄전 목사님이 담배는 피우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담배를 거리낌으로 대하는 믿음 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담배를 포기한 것입니다. 신자는 모든 일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자유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고전10:23~24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이 참으로 이웃을 세워주는 성숙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 신자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0:31).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 것인가가 아니라, 이웃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에는 언제나 강한 사람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어른들이, 인생의 선배들이, 신앙생활을 먼저 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항상 먼저 양보를 해야 합니다.
3.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17).
대부분 사람들의 논쟁의 자리에 들어가 보면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껍데기를 가지고 논하다가 열을 올리고 열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문제도 마찬가집니다. 거의 대부분이 비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어떻게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느냐. 여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게 되면 사소한 것 때문에 얼굴 붉힐 일도, 마음 상할 일도 없습니다. 사소한 실수나 차이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가치를 위해 양보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 지미카터에게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소감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통령 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대통령이 아닌 이웃사랑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분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눈물겨운 바램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해비타트운동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라는 변호사이자 사업가에 의해 시작된 운동입니다. 풀러는 나이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이혼선언을 하고 그에게서 떠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 전부인줄 아는 남편의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진지한 신앙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州)의 클래런스 조던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을 방문하여 인종을 초월한 공동체적 신앙생활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즉시 그는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곧 자기의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 자동차, 보트, 자가용 비행. 모두를 팔아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졸지에 백만장자에서 빈 털털이가 되었지만 그는 행복을 찾았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고, 마틴 루터 킹 인도주의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해비타트 관계자는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는 욕심을 버려 하나님을 만났고, 물질을 포기하여 가치를 발견했고, 특권을 포기하고 행복을 얻었으며, 자신을 버려 이웃을 찾았고, 쾌락을 버려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다." 저는 이 말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삶이요, 우리 신자가 추구해야 할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권과 물질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희생, 주님의 피 흘리심, 주님의 섬기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이웃을 세워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풀러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가리켜 '망치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망치로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새 삶을 체험한 그는 새로운 섬김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삶을 세워주는 일생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지미 카터도 사랑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집을 세우고 그들의 새 인생을 세워주는 일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이웃들을 세우기 위해 꼭 망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악수, 중보의 기도, 소리없는 미소, 변함없는 관심. 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이웃들은 새 인생의 집을 지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인생을 사모하십시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이웃이, 교회의 지체들과 교회가, 일터와 이 사회가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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