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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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0회 작성일 25-09-14 14:49본문
감사가 최고다!
시50:1~23
2025. 9/14, 11:00(성령강림 열다섯 번째 주일)
두 개의 주머니
오래 전, 한 에세이에서 읽은 글이다. 글쓴이의 중등시절 이야기로, 친구 한 명이 작은 쪽지에 무엇인가를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는지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자기를 섭섭하게 하거나 힘들게 한 사람의 이름과 날자, 그리고 내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자기가 힘이 없어 당하지만 언젠가 힘을 가지게 되면 그때 복수를 위해 지금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어두어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 비밀 노트에 옮겨 적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는 순간 섬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역시 결심을 했다. 자기를 섭섭하게 한 사람과 그 일, 고마운 사람과 그 일을 쪽지에 적어 모으기로 했다. 그런데 섭섭하게 한 사람과 그 일을 적은 쪽지는 밑이 터진 주머니에 넣고, 고마운 사람과 그 일은 터지지 않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니 저녁에 자신의 비밀 노트에 적을 내용은 고마운 사람과 그 일을 기록한 쪽지뿐이었다. 복수를 생각하며 산 사람과 고마움을 생각하며 산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분명하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부유한 사람도 불행할 수 있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쪽지가 있다. 하나는 감사의 쪽지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의식의 쪽지다. 피해의식의 쪽지를 택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는 모든 일에서 기쁨과 감사는 말끔히 걷어내고, 불평과 불만만 소중히 갈무리한다. 이들에게 삶은 축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주위에 어둠을 뿌리게 된다. 하지만 감사의 쪽지를 택한 사람은 똑같은 일상을 살면서도 불평과 불만은 걸러내고, 감사와 기쁨을 소중하게 갈무리한다. 이들의 표정은 밝고, 삶은 축제이다. 그리고 주변을 행복하게 만든다. 감사의 쪽지를 가진 사람의 말은 항상 이렇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 이런 것을 은혜의식이라고 한다. 은혜의식으로 살면 삶 자체가 감사로 가득하게 된다.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
본 시편은 독특한 시다. 대부분의 시편은 말하는 사람(화자)이 시인이고, 기도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 시편은 화자가 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마치 선지자의 통렬한 정죄 선언처럼 들리는 시다. 그래서 본 시를 ‘예언시’라고 부른다. 이 시는 표제가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성전 찬양대의 지휘자이자 선견자(선지자) 알려진 인물이다(대상6:31-48). 이 표제를 가진 시편은 모두 12편으로, 나머지 11편은 73-83편이다.
본 시편은 한 장의 기소장, 혹은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전체 분위기는 판사가 법정에 입장하여 증인을 부르고, 피고인을 세워 재판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여기서 재판장은 하나님이시고, 피고인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강림하셔서 증인과 피고인을 소환하는 장면이다. 이어서 피고인 이스라엘의 죄를 두 가지로 지적하시는데, 첫째는 그들의 형식적인 예배생활이고(7~15), 둘째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이다(16~23). 예배와 삶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배의 실패는 곧 삶의 실패로 이어지고, 형식적인 예배생활은 위선적인 삶으로 드러난다. 그 중심에 ‘감사’가 있다. 이 시는 오늘 우리의 예배와 삶을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한다.
감사를 회복하라!
본 시에 예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5절이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제사로 언약을 맺은 이들을 불러 모으셨는데, 그들이 곧 성도(이스라엘 백성)다. 성도는 예배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가 그 정체성을 결정하고, 또한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 시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그들이 예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예배는 화려하고 풍성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에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책망한 것이 아니다(8). 화려하고 풍성했지만 그들의 예배에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빠진 것이다. 그것은 곧 ‘감사’다.
본 시는 제사의 본질은 제물이고, 제물의 본질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셨던 말씀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다윗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시51:17).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제사자)의 마음이다. 사무엘은 그 마음을 ‘순종’이라고 했고,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본 시편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14).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23). 예배의 핵심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고, 감사 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습관적으로 반복적인 형식적인 예배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기만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위해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감사를 회복하려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여기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너희여’는 뒤에 나온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곧 감사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가 가능하겠는가? 대신 ‘감사의 제사’란 자신에게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사는 행한 일을 기억하고 생각할 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감사를 회복하려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다(찬송가 304장).
찬송가 304장의 작사가처럼 감사를 회복하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세상은 어렵고 어지럽고 암담하다. 하지만 감사를 회복한 사람은 짙은 어둠에 매몰되지 않는다. 울면서라도 일어나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그 희망의 근거다. 감사하면 믿음의 눈이 열리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작지만 소중한 생명의 씨앗이 보이기 마련이다. 같은 일도 전혀 새로운 일이 된다. 그래서 눈물이 기쁨이 되고, 탄식이 찬양이 되고, 불평이 감사가 되고, 평범한 일상이 경건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필립 얀시의 책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에 나오는 글이다. ‘내가 인생의 지극히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리고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감사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발이 아니라 감사합니다.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학자 피티림 소로킨은 현대 사회를 위기의 시대로, 오든은 불안의 시대로, 알렉산더는 불합리의 시대로,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로,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로,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표현했다. 공통적인 것은 현대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삶 또한 건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변에 영혼의 허기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배고프면 밥을 찾듯이 영혼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는 ‘감사’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애니 딜러드(Annie Dillard)의 말이다. ‘나는 죽는 순간 드리는 기도가 제발이 아니라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떠날 때 문간에서 손님이 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듯이 말이다.’(「팅커 크리크에서의 순례」중에서).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죽는 순간에 드리는 기도는 원망과 아쉬움의 ‘제발’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받아들이고 삶의 모든 순간을 기뻐하는 ‘감사합니다’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일상도 감사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감사를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평생을 예배자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 감사로 물든 일생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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