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이끌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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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70회 작성일 25-06-08 13:29본문
성령에 이끌리는 삶
눅2:22~35
2025. 6/8 11:00(성령강림 주일)
든든히 서려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그렇게 흔들리고, 자주 넘어지고, 또한 쉽게 영적 탈진이 일어날까? 여러분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주님과의 접촉면이 좁거나 약하기 때문이다. 발끝만 디디고 서면 오래 버틸 수 없다. 땅과 접촉면이 넓지 않기 때문에 힘들어 곧 넘어진다. 살짝 닿기만 해도 넘어진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겨우 발가락 몇 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주님과의 접촉면이 좁고 든든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유혹이나 어려움에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고, 쉽게 낙심하고,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물에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물에도 잘 씻기지 않는다. 일부러 쓰러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접촉면이 넓고 클수록 안전하고 든든한 것처럼 신앙생활도 주님과의 접촉면이 넓고 클수록 안전하고 든든한 신앙이다.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을 주님과의 ‘접촉면’을 확장하고 확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의 접촉면을 확장하고 확대할 수 있을까? 사실 경건한 모든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쉬지 않고 기도하고, 틈나는 대로 찬양하고, 자나 깨나 말씀을 듣고 읽고 쓰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변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기회가 있는 대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주님의 몸인 교회와 그 몸의 지체를 사랑하는 것, 이런 모두가 주님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키우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여 ‘예배’라고 한다. 예배는 모든 경건생활의 마스터키(master-key)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속적인 예배생활이 주님과의 접촉면을 확장하고 확대하는 비결이다. 안정되고 든든한 신앙생활의 비결이다.
신앙생활의 마스터키, 예배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예배는 가장 ①중요한 일이요, 가장 ②긴급한 일이요, 또 가장 ③영광스러운 일이다.’ 단순하지만 핵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배보다 중요한 일이 없고, 예배보다 긴급한 일이 없고, 예배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중요한 일 때문에 예배를 거르기도 하고 긴급한 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경우를 말하곤 한다. 그런데 예배보다 중요한 일, 예배보다 긴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신앙의 성숙은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이를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 구약에서부터 공적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영혼에게 유익을 주는 수단이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다. 거기서 잠자던 영혼을 깨우고, 영혼을 살아나게 하고, 죄 사함과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장 잘 의식하게 되며, 그래서 자기의 죄악된 삶에 대하여 참회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것도 예배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가장 잘 주어진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신분을 가장 잘 깨닫게 된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주는 것이 예배이고, 천국에서도 쉬지 않는 것이 예배다. 이것이 예배의 중요성이고, 가치이고, 영광이다. 때문에 예배를 잠시도 멈춰서는 안 되고, 예배에 집중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예배의 중요성과 긴급성, 그리고 가치와 영광에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한다. 열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
본문에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이 그 주인공이다. 본문은 시므온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고(25), 둘째는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다(26).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는 모든 유대인이 염원하는 ‘메시야’를 뜻한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손꼽아 기다렸다. 시므온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미 오셨고, 또한 오신 것을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누구도 이 소식을 귀담아들은 사람이 없었고, 만난 사람도 없었다. 약속했고, 약속대로 오셨고,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데 아무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와중에 시므온이 메시야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가 이런 복을 누리게 된 이유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본문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의 태도와 관련하여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경건하여’란 단어가 그것이다. 물론 우리 성경으로만 보면 특별할 것이 없지만 원어는 다르다. ‘경건하여’란 단어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유라베스’(ευλαβης)인데, ➀율법, 곧 말씀을 성실하게 행하여 영성이 깊은, ➁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시므온이 어떤 자세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말씀을 사랑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셨고,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결례차 성전을 방문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던 메시야로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되었고,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29~32), 또한 마리아에게 의미심장한 예언을 남겼다. 이것이 곧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복이다.
예배의 영광과 복
누가복음이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성령의 역할’이다. 성령이 함께하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이끄심이 있어야 메시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누가의 신학이다. 이런 누가의 신학이 잘 드러나고 있는 곳이 본문이다. 본문은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역사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하시고, 어떤 사람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고, 또한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지 잘 보여준다. 이를 시므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5,26). 성령이 항상 그와 함께 계셨고, 또한 성령의 지시를 받고 살았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메시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7). 그에게 이런 삶이 가능했던 이유가 앞에서 말한 대로 말씀을 성실하게 행하며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하시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통해 성령의 함께하심과 성령의 이끄심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 만으로도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 영광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배를 좋아했던 사람
시므온 외에 예배를 좋아했던 사람이 또 성경에 나온다. 다윗이다. 흔히 다윗을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예배자라고 부른다. 그의 시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집에 (예배하러) 올라가자는 말만 들어도 기뻐했던 사람이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그가 한 때 아들 압살롬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피난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했던 것은 무리와 함께 예배했던 일을 기억하며 예배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는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사장 아론의 임직식에, 가나안 땅 전 지역에 생명을 공급하는 헐몬의 이슬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다.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시133:1). 우리 주님도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외치실 것이다. ‘얼마나 선한가!’(םה טוב), ‘얼마나 아름다운가!’(םה נים). 예배만큼 선한 것이 없고, 예배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 예배의 영광과 가치, 중요성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렇게 다윗이 예배를 좋아한 이유는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 영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둬가시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울과 그의 가문이 몰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자 그때부터 사울은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고, 악령에게 사로잡혀 살았다. 그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다윗은 이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은 것이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리고 성령이 항상 함께하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기 위해 예배를 갈망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예배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가 예배를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오늘이 성령강림 주일이다. 우리 기독교회의 생일과 같은 날이다. 성령강림과 함께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성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고, 주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따르게 한다. 우리의 기도를 돕고, 죄를 깨닫게 하고, 각종 은사를 부어주어 주님을 섬기게 하고, 그래서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이끈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통로가 예배다. 다윗처럼, 시므온처럼 예배를 좋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 예배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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