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멸의 땅에서 피어난 생명의 꽃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08회 작성일 25-02-16 15:06본문
진멸의 땅에서 피어난 생명의 꽃
수2:8~14
2025. 2/16 11:00
사막을 물들인 꽃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연평균 강수량이 거의 0㎜에 가까운 불모지다. 사막의 꽃으로 알려진 선인장조차 자라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기상이변으로 2015년 3월에 비가 쏟아졌고, 비가 그치자 그 척박한 불모지 곳곳에서 파란 싹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라 꽃망울이 맺히더니 사막이 온통 분홍색 당아욱 꽃으로 만발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이 사건은 사막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사막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아니라 ‘생명을 품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곳에 단비가 내리자 생명이 약동했고, 순식간에 사막이 꽃밭으로 바뀌었다. 사막처럼 메마른 우리 심령과 삶에도 복음의 단비가 부어지면 생명의 꽃이 만발하리라 믿는다. 동시에 우리가 복음의 단비를 주변에 열심히 뿌려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문 역시 아타카마 사막을 분홍색으로 수놓은 꽃과 같은 이야기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참혹한 전쟁이야기다. 특히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수행되는 ‘진멸’(殄滅) 전쟁이다. 이렇게 참혹하고, 누구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본문이다. 그 주인공은 여리고 성벽에서 살고 있던 기생 ‘라합’이다. 성벽은 성 안과 밖의 경계로, 라합이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녀가 안에도 밖에도(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 살았다는 의미다. 이런 그녀(그녀의 가족까지 포함하여)가 살아남은 이야기다. 이런 삶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에게 복음이라는 단비가 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죽음의 땅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당아욱 꽃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진멸의 땅에서 화려한 생명의 꽃이 된 것이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빌립보 간수에게 외쳤던 바울의 외침을 그녀는 바울보다 천 수백 년 전에 이미 온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가 이런 복을 받게 된 것일까? 그것은 ‘들음’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듣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의 청력(듣는 능력)이 시력보다 정확하고 오류에 빠질 확률이 더 적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듣는 것’이 중요하다. 듣는 것은 정보가 된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에 의해서 그의 행동이 결정된다. 어떤 사람에 대한 사전 정보(선입견)가 입력되면 그 사람의 본질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그 정보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건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듣는 것을 잘 들어야 한다. 사실 우리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이고, 들음의 영성을 강조한다. 성경에 들음과 관련된 단어가 500번 이상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열중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말을 많이 하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작은 소리,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까지 민감하게 잘 듣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노만 아우구스틴의 말이다.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은 들어도 너무 많이 듣는다는 비난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말은 적게 할수록 좋고, 많이 들을수록 좋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그렇다. 많이 하는 것보다 많이 듣고 잘 들어야 한다. 아무리 열심이 있고 충성해도 주님의 음성 듣는 일에 민감하지 못하면 그의 삶과 사역은 주님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은 들음에서 시작이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아무리 하나님의 집에서 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은 아니다(삼상3:7).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된다(삼상3:9).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그의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의 종이 되고,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의 종이 된다(요8:47). 그러므로 우리는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사람이 되고(요10:3),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고,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라합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꽃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들음 때문이다.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반응이다.
그런데 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들음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에 대한 반응이다. 창조적 반응을 보여야 한다. 오래전 어떤 사람이 내게 그랬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물론 비아냥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덕담으로 받았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에디슨은 어렸을 때 기차 차장에게 귀를 얻어맞아 고막이 터졌다. 그래서 잘 듣지 못했다. 나중에 성공한 후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듣지 못해 불편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물론 불편했지만 안 들려서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도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달라지고,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니 들음도 중요하지만 그 들음에 대한 반응이 더 중요하다.
라합은 40년 전부터 최근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들을 다 들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10). 여기서 홍해사건은 출애굽 초기에 있었던 것이고,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사건은 최근에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온 다음 하나님께 행하신 일의 처음과 나중으로,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들음의 주체다. 그 주체가 ‘내’(라합)가 아니라 ‘우리’(여리고 모든 주민)이다. 왕을 비롯한 모든 우리(라합 자신을 포함한)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놀랍고 위대하신 일들을 들었다. 이렇게 다 들었으니까 여리고에 거주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죽임을 당하고, 성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물은 파괴되고 불 태워졌다. 왜 다 함께 들었는데, 이런 결과가 발생한 것일까? 이것이 곧 들음에 대한 반응 때문이다.
라합과 여리고 백성의 차이
같은 들음에 대한 라합과 여리고 백성의 반응에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차이가 그들 사이의 생명과 죽음이라는 차이를 만들어냈다. 여리고의 왕과 모든 백성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듣고 큰 공포와 두려움으로 완전히 절망하였다. ‘심히 두려워하고......간담이 녹나니.’(9). ‘마음이 녹았고......정신을 잃었나니’(11). 그리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7). 이것이 그들의 들음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린 것이다. 반면에 라합은 듣고 창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고(6), 이스라엘에 대한 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소상히 알려주었다(9~11a). 또한 정탐꾼을 안전하게 탈출시켰다(15).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b). 이어서 자신과 부모형제의 구원을 요청했다(12,13). 그녀의 요청은 요청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되어 진멸의 장소에서 생명의 꽃이 된 것이다.
비슷한 사건이 9장에서도 나온다. 여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부족의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기브온 족속’이다. 그들도 라합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모두 듣고, 특히 여리고와 아이 성과 같은 가나안 중부지역이 허망하게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것을 듣고 살 길을 찾아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찾아왔고,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진멸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반면에 기브온과 같은 가나안 남부지역의 다른 나라들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공격했다. 그랬다가 크게 패했다(10장). 가나안 북부지역도 마찬가지다. 남부와 중부지역이 모두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사실을 듣고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웠으나 패배했다(11장).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듣는다고 다 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반응을 해야 한다(엿과 떡). 특히 신앙은 그렇다. 잘 반응하여 우리의 들음이 복이 되도록 하자. 이를 강조한 사람이 야고보 사도다(약1:22~25 참고).
호명반응(呼名反應)
호명반응이란 말이 있다. 아기가 자신의 이름이나 특정한 호칭에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아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연스럽게 반응하여 시선을 돌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따라서 호명반응은 아기의 사회적 기술과 의사소통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호명반응은 일반적으로 6개월에서 1세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아기는 자신의 이름을 인식하고, 부모나 주변 사람의 주목을 받을 때 반응하는 행동을 보인다. 그렇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를 가진 아기는 이러한 반응이 부족하거나 전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호명반응의 결여는 자폐증(自閉症, autism)의 조기징후로 간주될 수 있다. 심각한 것은 이런 자폐증상이 전에는 만 명 당 1명이었으나 최근에는 150명 당 1명의 아기가 자폐증을 보인다고 한다.
자폐(自閉)란 말 그대로 외부로 향한 문을 굳게 닫고 자기 안에만 갇혀서 외부의 부름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 중에도 자폐 성도가 많다. 소위 영적인 자폐증에 걸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거나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건강하고 성숙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민감하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다. 잘 듣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cccegHH6_zU 131회 연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