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부르는 짐,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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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81회 작성일 25-02-09 14:16본문
복을 부르는 짐, 배움
딤후3:13~14
2025. 2/9 11:00
아는 만큼 누린다.
필립 얀시(P. Yancey)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다. 바다와 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스페인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대륙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탄 배가 이미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다. 하지만 강폭이 너무 넓어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대서양에 떠있는 줄 알았다. 그때 그들 중 여러 사람이 죽었다. 원인은 갈증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바다위에 떠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의 한복판에 있었는데도 갈증으로 죽었다. 바다와 물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자랑했던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결국 바다와 물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인간 지식의 한계와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아무튼 무엇이든 아는 만큼 누리게 된다. 반면 알지 못하면 스페인 선원들처럼 풍부한 생수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망하게 된다.
신앙생활도 아는 만큼 누린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북(北)왕국이 멸망하기까지 활동했던 호세아 선지자(주전 750년~주전 722년)는 그들의 멸망원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4:1,6, 5:4)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래서 호세아는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6:3)고 촉구하였다. 사실 그들은 바다와 물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수 한복판에서 갈증으로 죽은 스페인 선원들처럼 하나님의 선민이었지만 그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망하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풍성한 영적 생활의 비결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 성경에 대한 배움을 강조한 것이다.
속이고 속는 세상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책이다. 본문은 그 마지막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된다. 바울은 3:1절에서부터 말세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본문이 그 결론이다. 13절은 말세의 특징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여기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단사상을 가진 자들과 이런 자들의 영향을 받아 믿음의 사람을 미혹하고 핍박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더욱 악하여져서 서로 속이고 속는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성도와 교회를 무너지게 하리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를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배고픈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대듯 사단과 그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성도와 교회를 그렇게 넘본다고 했다(벧전5:8).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시대, 이들이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고 속는 시대,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가 직면한 현실이다.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바울은 이렇게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사랑하는 제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우선 ①‘이것을 알라.’(1). 이것은 말세의 특징으로, 말세의 특징을 잘 알라는 것이다. 즉,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다음은 이런 시대에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핍박이 따르게 되는데,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라도 ②‘경건하게 살라.’(12). 어려움을 감수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③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는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 이것들은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당부이자 말세를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다. 특히 중요한 것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시대를 분별하고 믿음을 지키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신은 ‘어떤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신념’을 뜻하고, 거하는 것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물러 있는 것, 혹은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자가 득세한 세상, 속고 속이는 살벌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믿음의 삶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이단에 넘어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확신의 부족이다. 구원의 확신, 용서의 확신, 임재의 확신, 승리의 확신, 인도의 확신 등 기본적인 신앙적 확신이 부족하다.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식물로 말하면 뿌리가 든든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고, 건물로 말하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다. 이렇게 확신이 부족하니까 작은 시험과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확신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확신에 거하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확대가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기초를 튼튼하게 놓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고(골2:7),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마7:24). 이와 같은 배움을 통해 우리 신앙이 자라고 믿음의 집이 든든하게 세워져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우리 안에 확신이 생긴다.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신, 용서의 확신, 인도의 확신, 승리의 확신, 치료의 확신, 회복의 확신 등.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힘써 배워야한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시1:2)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은 ‘힘써 배운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말씀을 즐거워하여 힘써 배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가뭄도 걱정하지 않고(렘17:8),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된다(시1:3).
배운다는 것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다룬 서부영화를 보면 많은 사람이 마차를 타고 황금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달리고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황금을 찾아 달리고 있는 인간행렬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대상만 다를 뿐 ‘황금을 쫓는 사람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다(시19:10). 그 이유는 말씀이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시19:7,8).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맥(金脈)을 찾은 것이다. 말씀에 대한 이런 고백은 말씀을 열심히 읽고 부지런히 공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주의 깊게 공부한 사람만이 그 속에 숨겨있는 보물을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읽는 사람에게 말씀은 보물은커녕 수면제만 될 뿐이다. 말씀을 수면을 유도하는 수면제로, 혹은 삶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진통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가끔 읽고, 가끔 배워야 한다. 자주 사용하면 중독이 되니까! 하지만 말씀에서 금맥(생명, 영생, 은혜, 능력, 영광, 축복 등)을 발견하기 원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끊임없이 공부하기 바란다. 그러면 성경이 품고 있는 수많은 보배를 ‘발견’하고, ‘경험’하고, ‘누리’게 될 것이다.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나타난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 주님의 계획, 주님의 소원, 주님의 역사(삶)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깨닫고, 감동하고, 실천하게 된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배우면 변하게 된다.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 변하게 되고, 더 깊은 은혜의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배우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히브리어로 배운다는 뜻을 가진 단어 중에 ‘하나크’(חנך)가 있다. ‘가르치다.’, ‘일생을 바치다.’, ‘(간격을)좁히다.’ 등의 뜻이 있다. 이 단어에 신앙교육의 목적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일생을 바치는 훈련이다. 간격을 좁히는 훈련이다. 즉, 신앙교육의 목적은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도록 하는 훈련이다.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단어에서 ‘에녹’이란 이름이 나왔는데, 에녹은 하나크의 뜻을 잘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던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좁혀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더니 이런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목적, 성경을 가르치는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것, 주님께 일생을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보배, 천국의 보배가 되게 하는 것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禮記).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뜻이다. 스승은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을 통해 자라나는 것이다. 실은 배우는 사람보다 가르치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Joseph Joubert). 가르치기 위해서 배우고, 또한 가르침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르침은 적극적인 배움’이다. 자격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확실한 배움을 위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우는 일을 사모하기 바란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을 더욱 사모하기 바란다. 물론 이 나이에 배운다는 것 쉽지 않다. 게다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더욱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이다. 그렇지만 그냥 짐이 아니다. 복을 부르는 짐이다. 이것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비결이다. 여기에 즐겁게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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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XRWehvugSMY 12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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