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나를 돌보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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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74회 작성일 24-11-17 16:31본문
어찌하여 나를 돌보시나이까?
룻2:8~13
2024. 11/17 11:00(성령강림 스물일곱 번째 주일, 추수감사절)
무릇 네 생각을 지키라.
감사를 입에 달고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감사 할아버지’ 라고 불렀다. 어느 날, 이 할아버지가 고기 한 근을 사들고 집으로 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개가 내동댕이쳐진 고기를 물고 달아났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한 젊은이가 물었다. ‘뭐가 감사하세요? 고기를 잃어버렸잖아요!’ ‘글쎄, 고기는 잃어버렸지만 내 입맛은 그대로니 감사한 일 아닌가?’ 라고 대답을 했다.
같은 일, 같은 사건도 어느 관점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린 고기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에서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바꾸면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없는 중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것이 보이고, 그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 된다.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라’(잠4:23)고 하였다. 마음이 곧 ‘생각의 좌소’(座所)이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 생각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주님께 두고,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이 가능해진다.
은혜를 입은 여인, 롯
롯(Ruth)은 이방 여인이다. 율법에 의하면 영원히 여호와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모압 사람이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 그런 그녀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다윗의 증조모로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구원이 혈통이나 율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인 것,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재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룻기가 구약에서 가장 ‘복음적인 책’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룻이 베들레헴의 유력인사 보아스(Boaz)를 만나서 그에게 은혜를 입었는데, 그녀가 이에 대하여 사례하는 장면이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사람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에도 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감사’로 표현된다. 본문에서 이방인이지만 차별하지 않고 은혜를 베푼 보아스(8,9)와 이런 보아스의 태도에 무릎 꿇고 답례하는 룻의 모습(10)이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그 모습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10a).
이는 고대근동 지방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경, 감사를 표현하는 행동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거나 하나님이 보낸 천사을 만난 사람(창18:2, 창19:1, 수5:14),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마2:11, 계4:10),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막5:33, 눅17:16 등)이 보여준 공통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릴 때의 모습이기도 하다(겔9:8, 마26:39). 여기서 룻이 보여준 태도는 보아스의 호의에 대한 감사표현이다. 보아스로부터 넘치는 호의를 받자 최상의 감사를 표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은혜를 베푸는 것도 아름답지만 은혜에 보답하여 감사하는 모습은 더 아름답다. 이런 모습이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감사는 형통의 문이다. 감사하는 룻에게 계속해서 좋은 일이 연이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들레헴 최고 부자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감사가 중요한 것은 감사하다보면 삶의 모드(mode)가 바뀌게 된다. 불평 모드에서 감사 모드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감사할 일이 생기고, 불평하는 사람에게 항상 불평거리가 떠나질 않는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고(살전5:18), 축복으로 가는 통로다. 절망의 씨앗이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감사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10b).
이 고백은 룻이 보아스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게 된 배경이다. 한마디로 자신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사실이 그렇다.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이방인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다. 다윗 앞에서 므비보셋이 자신을 죽은 개에 비유를 했는데(삼하9:8), 이 표현이야말로 룻에게 적합하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방인을 부정한 짐승 개처럼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과 상종을 꺼렸다. 게다가 모압과 암몬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이지 말라고 율법에 명시까지 해두었다(신23:3). 그런데 룻은 바로 그 모압 출신이었다. 멸시를 당하고 내쫓김을 당하지 않는 것만도 감사할 일인데, 따뜻한 위로(8)와 보호(9), 그리고 돌봄까지 받고 보니 몸 둘 바를 모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의 동기이고, 예배자의 자세다. 이런 자세에서 진정한 감사의 고백, 감사의 찬양, 감사의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감사의 가장 무서운 적은 ‘당연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당연하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자신이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가 말 잘 듣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자녀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아내는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남편은 아내가 자녀를 잘 돌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여긴다. 더 나아가서는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자신의 뜻대로 삶이 흘러가는 것 또한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삶에서 당연함이 늘어날수록 삶은 황폐해지게 된다. 삶에서 당연함이 늘수록 감동과 감격, 감사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당연함은 삶을 메마르게 하고 위축시키고 마는 가뭄과 같다. 그러므로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의식을 버려야한다. 우리의 삶에서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자격을 따지지 않고 거저 주어진 은혜다. 바로 이런 은혜의식에서 감사가 나온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눈 뜨게 될 때, 그것이 은혜였음을 알게 되면서 감사가 솟아나게 된다. 룻이 보아스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같이 외쳐보자!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0).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무엇으로 보답할까.’(시116:12).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3).
보아스의 호의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은혜 받을 자격 없는 자신의 고백에 이어서, 여기서는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간구다. 이는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과 지금도 은혜 속에 살고 있지만 더 큰 은혜를 받고 싶다는 뜻이다. 룻의 인격과 신앙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인격이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즉, 자신은 보아스의 도움이 필요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겸양과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성도는 주님을 향하여 이와 같은 고백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고, 지금도 은혜 안에 살고 있지만 날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이런 겸손과 간절함이 건강한 성도의 고백이고 자세다.
사실 보아스는 8절에서 이미 룻에게 지속적인 은혜를 보장했다. 그것은 ①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②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줍고, 자기 일꾼과 함께 거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보아스의 보호와 돌봄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룻이 우리 자신이라면 보아스의 밭은 교회이고, 그의 소녀들은 믿는 지체들이다.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지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은혜는 입는 비결이고, 더 풍성한 은혜를 받는 비결이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행2:46)이다. 모여서 배우고, 모여서 교제하고,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찬송하고, 모여서 예배하는 일로 나타나게 된다.
감사의 ‘렌즈’(Lens)
서두에서 관점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인생과 세상은 어떤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불만이란 렌즈로 인생과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인생과 세상은 온통 불평거리다. 허무의 렌즈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 인생과 세상은 모두가 부질없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의 렌즈로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이 온통 분노덩어리로 보이고 분노가 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사의 렌즈로 인생과 세상을 보면 모두가 감사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자녀를 보고, 부모를 보고, 아내와 남편보고,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작은 것, 사소한 것도 크게 소중하게 볼 수 있는 감사의 볼록렌즈를 갖자. 그러면 넉넉함과 풍요로움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jZhdtZSFMQo 23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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