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좀 보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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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201회 작성일 24-09-22 12:25본문
하늘 좀 보고 살아라!
민21:4~9
2024. 9/22(성령강림 열아홉 번째 주일)
뱀을 부르는 소리
어려서 저녁에 휘파람을 불면 뱀 나온다고 어른들이 말렸다. 이는 땅꾼이 뱀을 잡을 때 휘파람을 불었던 것에서 생겨난 것 같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뱀을 부르는 소리가 나온다. 그 소리가 곧 ‘불평과 원망’이다. 본문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가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부모 세대가 실패했던 장소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하여 모압 평지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먹는 음식과 마실 물도 변변치 못해 힘들어 죽겠는데, 에돔이 길을 내주지 않아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4). 그러자 백성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5).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낸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맹독을 지닌 불 뱀에 나와 불평하는 백성을 물어 사람이 많이 죽어갔다. 이 사건은 상징성이 크다. 그것은 불평과 원망이 내 안에, 우리 가정에, 또한 우리 교회에 불 뱀을 부른다는 것이다. 주변에 보면 뱀에 물려서 고통하는 사람, 뱀에 물린 위기의 가정, 뱀에 물려 깨어진 교회가 많다. 모두가 불평과 원망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삽입된 사건이다. 저자가 이 사건을 여기에 삽입한 데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하나는 부모세대나 자녀세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평하고 원망하다 부모세대가 광야에서 무너진 것을 다 본 그들인데, 그들 역시 상황이 어렵다고 불평을 쏟아낸 것이다. 그러니 불평과 원망은 고치기가 쉽지 않는 난치병이다. 불평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놓아도 불평하여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에서도 감사하기에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감사를 회복하여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자녀세대에게도 소망이 보이지 않기는 매 한 가지다. 그들 힘으로는 절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나안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이 본문의 사건이 가진 또 하나의 의도다. 즉,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에 즉각 불 뱀을 통해 징계하셨고, 그들이 모세를 찾아와 회개하며 중보를 요청했다. 그리고 모세가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해결방법 또한 즉시 일러주셨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놓고 그것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이다. 처방치고는 너무 간단하면서도 싱겁기가 그지없다. 왜 장대에 구리 뱀을 달라고 하셨을까? 왜 이런 처방을 주신 것일까?
첫째, 순종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성경에는 지켜야 할 많은 법과 규례가 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위한 요구사항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가 있다. 그것은, 곧 ‘순종’이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 문턱을 넘지 못하고 광야를 40년 동안 배회하다가 그곳에서 죽은 이유가 바로 순종 때문이다. 순종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실패사건도 모두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주신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a). 구약종교의 핵심이 제사이고, 제사의 핵심이 제물인데, 이 모든 것보다 나은 것이 ‘순종’이라는 것이다.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우상숭배와 맞먹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에는 오늘날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본문은 출애굽 2세대에게 순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장대에 구리 뱀을 매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바라보라. 그러면 살리라!’ 사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 어처구니없는 처방이다. 틀림없이 어떤 사람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게 뭐야! 그저 쳐다보면 산다고? 무슨 이따위 처방이 있어!’ 그러면서 끝내 바라보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이니 믿고 바라본 사람은 신기하게도 뱀의 독이 빠져나가고, 붓기와 통증이 사라지면서 치료가 되었다. 순종했더니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를 깨달으라는 조치다. 내 경험이나 지식, 혹은 상황에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라는 것이다(눅5: 베드로의 소명 참조). 믿음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고, 순종을 통해 믿음이 드러난다. 이 믿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것이 순종이 중요한 이유다.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다. 믿음을 보시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드러난 믿음이다. 성도는 영적 군인이다. 군인의 미덕은 명령해석이 아닌 명령복종이다. 명령을 들었다면 들은 대로 따르는 것이다.
둘째, 바라봄의 영성을 회복시키시기 위함이다.
이해인 수녀의〈별을 보며〉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
이 시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별을 보았지?’ ‘여러분은 언제 별을 보았는가?’ 바쁜 현실에 쫓기듯 살다보니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바라본 기억이 아득했다. 그저 열심히 땅만 쳐다보았지 하늘을 바라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 마음을 먹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들과 둥근 보름달을 마음에 담고, 밤하늘을 마음에 담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삶에 대한 불안과 염려, 불평과 원망, 여러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άνθρωπος)라고 한다. 위를 쳐다보는 존재란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러면서 감사해야 하는데, 자꾸 땅만 바라보고 살다보니 현실에 매몰되어 기도도 찬양도 잃게 되고, 기도와 찬양이 사라지니까 감사대신 불평과 원망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불평의 사람 원망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 하늘 좀 보고 살자.
본문은 쳐다보게 함으로써 ‘바라봄’의 영성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구리 뱀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흔히 신앙생활을 가리켜 ‘눈 바꾸는 훈련’이라고 한다. 땅엣 것에 집중해 있는 눈을 위엣 것에 집중하는 눈으로, 육적인 것만 바라보던 눈을 영적인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만 바라보던 눈을 주님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 신앙생활이다. 그 중심에 ‘예배’가 있다. 예배의 단순한 정의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을 닮게 된다. 우리는 바라보는 것을 본능적으로 닮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거룩한 습관이 되어 인생의 아침에도 주님을 예배하고, 인생의 황혼에도 예배하고, 성공할 때에도 예배하고, 실패할 때에도 예배하고, 아플 때에도 예배하고 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예배할 때마다 변화되고, 예배할 때마다 성숙하고, 예배할 때마다 거룩해지고, 그래서 주님을 ‘닮게’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특권이고 축복이다. 그날에 주님은 닮은 자를 찾으러 오신다. 참된 예배자가 그 주인공이다. 참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내일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 같은가?
어느 목사님이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심방을 갔다. 환자를 위해 기도하기 전 목사님이 그에게 물었다. ‘내일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그 환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침대에 누워있을 것 같습니다.’ 그 환자의 말을 듣고 목사님은 가방을 들고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도, 기도하면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없는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자 그 환자는 목사님에게 기도해달라고 애원하였고, 목사님은 다시 물었다. 같은 질문이었다. ‘내일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자 그 환자는 그의 아내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보! 나는 목사님께서 기도하고 나면 주님이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어요. 성령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임하였어요. 사장님에게 전화해줘요. 내일 출근한다고....’ 그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우리 남편 내일 출근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환자는 고침을 받았다. 기도는 형적인 종교행위가 아니다.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과 수많은 역동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영적 도구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믿음이고, 이 믿음으로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훈련은 출애굽 2세대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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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pPPNYWeYPXE 534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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