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으면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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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409회 작성일 24-09-08 15:51본문
담으면 닮는다.
레19:2
2024. 9/8(성령강림 열일곱 번째 주일)
가족유사(家族類似)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보면 모두가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어도 대략 누가 가족인지 알 수 있는 ‘유사성’(닮음)이 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가족유사’라고 했다.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그리스도를 맏이로 믿고 따르는 형제자매라면 우리 역시 닮아있어야 한다. 성도로서의 ‘가족유사’를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박에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의 형제자매이구나!’ 금세 그 닮음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누가 봐도 딱 가족 같은 그런 닮음이 있는가? 성도로서 자신에게 항상 물어야 할 질문이고, 또한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결심이어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본받아 따르는 생활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생활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 예수님의 모습과 삶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이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된다.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도 거룩해지려고 노력한다. 예수님을 자비롭고 인정 많은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본받아 닮아가는 삶이라고 말한 것이다. 본문은 이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다.
‘거룩’에 대하여
본문은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본받아 닮아가야 할지를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이다. ‘너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 모습을 본받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레위기의 핵심구절(요절)이고, 본문에 나온 ‘거룩’(Holiness)은 레위기의 핵심단어다.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도록 주어진 책이다. 학자들은 본서를 거룩이란 단어와 함께 크게 둘로 구분을 한다. 하나는 거룩의 길이고(1:~10:), 다른 하나는 거룩의 내용. 곧 거룩이 무엇이냐이다(11:~27:).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거룩이란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거룩은 히브리어 단어 ‘카다쉬’(קדשׁ)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 카다쉬의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하거나 ‘분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속된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을 대표하는 단어가 거룩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과 본성)을 계시하신 출3장 이후부터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거룩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국한하였으나 점차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에까지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 그 장소와 관련된 모든 것,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사용된 모든 제사기구와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인 제사장에게까지 거룩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이 단어를 사람과 사물에게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이다. ‘나처럼 되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를 닮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즉,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 거룩이란 단어에 이미 그 비결이 들어있다. 우선, 거룩한 삶은 ‘소속’에서 시작이 된다. 거룩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 카다쉬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봉헌(소속)되었다’는 뜻도 있다. 사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은 거룩하다(레27장 참조).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 즉,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기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이 계신 곳, 임재하신 장소, 모든 제사도구,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심지어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살고, 반역을 밥 먹 듯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거룩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속된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거룩한 삶, 곧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살 수가 있다.
다음으로, 거룩한 삶은 ‘분리’로 이뤄간다. 분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속을 위한 분리다(중생). 이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구출, 혹은 구원이라고 한다. 마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구출해낸 것과 같다. 다른 하나는, 소속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분리다(성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또한 자녀(혹은 신부)가 되었으니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분리다. 이 때 분리는 반복적인 사건이다. 출애굽기에 나온 십계명과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계약규정, 그리고 레위기에 나온 5대 제사제도가 이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모든 것, 곧 부정하고 속된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한 장치이다. 성도로서 합당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 습관 등을 분리하여 제거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건생활이고, 신학적인 표현으로 성화의 삶이다. 이것은 평생을 통해 이뤄진다. 딤전6:1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피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을 권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3절부터 10절까지 피해야 할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찾아서 읽음). 그런데 여기서 ‘피하다.’는 원어로 ‘지키다.’는 뜻이다. 더러운 것과 속된 것, 악한 것을 피하는 것이 곧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오물을 피하는 것이 오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범죄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다. 경건한 삶을 지키고, 성화의 삶을 지키기 위해 피하는 것이다. 분리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닮는 또 하나의 비결이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삶은 ‘채움’으로 완성이 된다. 앞에서 말한 분리와 여기서 말하고 하는 채움은 같은 의미다. 둘 다 성화의 삶, 곧 경건생활과 관련이 있다. 분리는 소극적인 의미의 성화(경건생활)를 말하고, 채움은 적극적인 의미의 성화를 말한다. 바울의 표현으로 전자는 피하는 것이고, 후자는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피해야 할 목록을 이야기한 다음 따라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이 모두는 채워가야 할 것들이다. 전자를 주님께 소속되기 전의 모든 것을 비워내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비워낸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로 채워가는 과정이다. 즉, ‘담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담으면 닮는다! 담는다는 것은 많이 생각하고 자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며 많이 생각하고, 자주 생각하는 것을 닮게 된다. 많이 생각하고 자주 생각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따라하고 싶고, 닮아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면 늘 함께 있고 싶고, 늘 함께 있다 보니 서로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닮는다는 것은 마음에 담는 것이고, 셀 수 없는 시간을 지불한 대가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 하나님을 닮으려면 하나님을 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것이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담고, 사랑을 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과 신령한 성품을 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닮는 비결이다.
닮으려면 담아야 한다!
신앙은 그 대상을 마음에 담는 것이다. 담을 때 닮아가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담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슷해져 가고, 그럴 때 닮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듣는 노래, 내가 자주 보는 책, 내가 자주 검색하는 주제, 내가 자주 하는 생각, 내가 자주 찾는 장소, 혹은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 등등. 바로 이것이 마음에 담는 것이고, 또한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닮아간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가고 있나? 내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항상 점검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흔히 ‘부부는 닮는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비과학적인 표현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DNA가 섞이는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본다하여 얼굴 형태가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난 부부는 누구라도 사진만 보고도 부부임을 짝지을 수 있다. 그만큼 부부는 닮았다는 얘기다. 부부는 3주 서로 연구하고, 3달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딘다고 한다. ‘다름’으로 만나 ‘같음’으로 사는 것이 부부라는 뜻이다. 부부가 서로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바치는 최상의 배려이자 이해다. 좋은 부부는 그래서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만큼 다름에도 서로 닮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닮게 되는 것이다. 흔히 성도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부에 비유한다(구약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이 말씀에는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뜻이 있다. 이러한 뜻이 더욱 명확한 것이 자녀의 비유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 것처럼 성도 역시 영적 부모이신 예수님을 닮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이에 대한 다른 표현이 본문이다. 그리고 닮으려면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하고, 끝까지 사랑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신 주님의 용서를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겸손, 주님의 지혜, 주님의 배려, 주님의 섬김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한다. 기도를 담고, 찬양을 담고, 말씀을 담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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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UCxvRe73-Fg 64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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