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주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051회 작성일 24-10-13 13:53본문
복 주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
신33:1~5
2024. 10/13(성령강림 스물두 번째 주일)
복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
한 새끼 백조가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하다가 새끼 오리들 틈에 살게 되었다. 그 새끼 백조는 오리 세계에서는 너무나 크고 다른 점이 많아 늘 왕따를 당하며 ‘미운 오리새끼’로 자랐다. 새끼 백조는 자기 정체성을 몰랐기에 늘 슬펐다. 그러다가 나중에 백조는 자신이 땅에서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오리가 아닌 하늘을 나는 멋진 백조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성도는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가 아닌 ‘창공을 나는 백조’란 정체성 인식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확실히 인식한다면 얼마나 자신감 있게 살겠는가? 그만큼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세는 신33장에 있는 축복유언의 시작 부분(1~5)과 끝 부분(26~29)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언급을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1). 고대 히브리인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 관습을 따라 모세는 죽기 전에 자녀와 같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위해 유언적 축복을 남겼다. 이 모세의 축복에는 예언(prediction)의 성격과 기도(benediction)의 성격이 동시에 있다. 구약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축복한 내용이 자주 나온다. 노아축복(창9:26,27), 이삭축복(창27:27~29), 야곱축복(창49:1~27) 등이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복된 존재임을 전제하면서(1-5), 12지파에 대해서 축복한다(6-25). 모세축복은 야곱의 축복과 병행되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세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본문은 모세축복의 서론으로,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오시는 하나님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2). 여기 ‘시내에서’ 라고 한 말씀은 시내 산을 가리킨다. ‘시내에서 오시고’는 완료진행형으로, 지난날 모세에게 오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모세와 그 백성을 찾아오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참된 복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시고 계신다는 이 사실에 있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심에 있었다. 이삭과 야곱의 복도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심에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고,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하나님이 이삭을 찾아오시고, 야곱을 찾아오신 결과 그들의 인생여로에는 예기치 못한 온갖 축복의 샘물이 터졌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복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오신 결과, 그는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새로운 존재적 사명과 목적을 깨닫게 되었다. 그 타지 않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 라고 그 이름을 불러주셨다(출3:1-5).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오셨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불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선민 이스라엘의 생활헌장인 율법(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심이 복이었다.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유월절을 체험했고, 출애굽의 사건을 체험했고, 홍해의 기적과 마라의 기적을 체험했다. 메추라기와 만나, 반석이 터져 토하는 생수를 체험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체험했고, 40년 동안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은총을 체험했다. 농사짓지 않고, 길쌈하지 않아도 장정만 60만 명이 넘었던 그들의 의식주가 해결되었다. 전 성경이 인류에게 주는 복의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을 먼저 찾아오셨다. 모든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오신다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찾아오시는 자기계시를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이다. 자손을 향한 모세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어나시는 하나님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2). 여기 ‘세일’은 험한 산악지대다. 그곳의 원주민은 호리족속이었는데, 에돔이 그들을 정복하여 에돔 땅이 되었다(창36:21). 에돔은 에서의 별명이다. 세일의 거민은 이스라엘과 대적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신명기에는 세일이 하나님의 원수로 나타나 있다(1:44). 대하20:1-25에 암몬과 모압과 세일지역의 거민이 일제히 동맹을 하고 일어나 유다를 침공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은 금식을 하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결사적인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백성이 떼를 지어 찬송하면서 전쟁터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복병’이 나타났고, 그 ‘여호와의 복병’이 유다를 치러 올라온 암몬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한 일이 있었다. 그 여호와의 복병은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거민들로 저희끼리 살육하며 피차 망하게 하였다.
여기 ‘여호와께서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라고 함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계된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일 산에서 일어나셨다는 것은 선민의 원수를 복수하기 위하여 급하게 행동하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의 초비상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유다를 치러 올라온 모압과 암몬과 세일 거민을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부리시는 복병을 동원하셨다는 뜻이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진군을 방해하는 아말렉을 진멸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닛시’가 되어주셨다(출17:8-1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어나신 경우다. 사무엘 선지자가 역사무대에 등장할 때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앞세우시고 미스바의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 그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아 미스바에 모였다함을 들은 블레셋 사람이 침공하였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바로 그 시간,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저들을 어지럽게 하여 이스라엘에게 패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이야말로 전적인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돌을 세우고 그곳을 ‘에벤에셀’, 곧 ‘도움의 돌’이라고 하였다(삼상3:7~12). 이것이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급히 일어나신 경우다. 예수님은 스데반 집사를 순교의 제물로 받으실 때 ‘일어나셨다.’고 하였다. 이는 스데반의 승리를 도와주기 위함이었다(행7:55). 스데반은 일어나 계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보고 더욱 용기를 얻어,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을 내면서 영광의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비취시는 하나님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2). 여기 ‘바란 산’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지나가던 광야를 가리킨다. 신명기는 ‘…크고 두려운 광야’(1:19)라고 하였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장막을 치고 머물렀던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12:16). 그때 그곳에 여호와의 구름이 머물렀다(민10:12). 그곳은 불모의 고지대로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산악지대다. 말하자면 죽음의 장소와 방불한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곳이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바란 산에서 비취신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가리켜 신명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32:10). 그렇다면 ‘바란’은 황무지요,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다. 절망과 죽음의 장소, 불안과 공포의 장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다. 전혀 소망이 없는 장소다. 사망의 그늘진 땅이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시고, ‘호위’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역사를 가리켜 바란 산에서 비추는 여호와의 빛이라고 한 것이다. 바란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이 왜 복된 자인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만 하는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복된 자가 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험악한 곳(바란산)에서도 구원의 빛으로 비취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바란 광야를 통과하는 자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 황무지요, 무서운 영적 맹수가 삼킬 자를 찾아 부르짖고 있는 장소다. 우리의 영혼을 유린하는 온갖 악한 영의 환경과 맹수가 출몰하는 세상이다. 비록 이런 험한 곳을 우리가 지금 지날지라도 빛 되신 주님이 친히 빛이 되어 주시기에 안전하게 갈 수 있고, 의미를 찾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여수룬의 왕이 되신 하나님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5).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칭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의로운 특성을 지닌 이상적인 민족을 뜻하는 말이다. 여수룬의 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하심으로 공식적으로 신정(神政)국가가 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여기에 ‘왕이 있었으니’ 라고 과거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심에도 훗날 이스라엘이 인간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할 것을 내다본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심령보다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흠이 없고 완벽한 통치자이시다. 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은 행복한 자이다. 거기다가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시고, 일어나시고, 비추시니 얼마나 행복한 자인가!
관련링크
- https://youtu.be/FbmSPF8FDsI 461회 연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