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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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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827회 작성일 24-07-2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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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1:35~39

2024. 7/28(성령강림 열한 번째 주일)

목적을 잃은 사람들

어느 회사에서 영업부 사원을 채용했다. 한 신입사원이 며칠 근무를 하고 난 후 처음으로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그 보고서를 본 영업부장은 기절할 뻔 했다. 그 보고서는 최소한의 격식도 갖추지 못했고,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이다. ‘돈두 한 푼 없는 것 가튼 사람에게 물거늘 파랏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고서는 더욱 가관이었다. ‘물거늘 마니파는 방버블 차자내씀니다.’ 부장은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그 사원의 보고서를 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그를 당장 해고시킬 것을 건의했다. 다음날 사장으로부터 결재서류가 내려왔고, 그 서류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 회사에 정말 필요한 인재가 들어왔소. 그의 보고서 철자에만 신경 쓰지 말고, 그가 쓴 보고서를 잘 읽어보고 당신도 물건을 많이 파는 방법을 연구하시오.’ 사장은 신입사원을 해고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업부장에게 영업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그 방법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사장은 신입사원이 보고서 작성에는 문제가 있어도 자신의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이 영업부장처럼 목적이나 방향보다 방법론에 집착하여 소중한 것을 헛되이 낭비한 사람이 많다.

 

곤충학자 파브르는 날벌레들이 앞에서 날고 있는 놈만 무턱대고 따라서 빙빙 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방향이나 목적지도 없이 그냥 돌기만 한다. 돌고 있는 바로 밑에다 먹을 것을 가져다놓아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돌기만 한다. 이렇게 7일 동안 계속 돌다가 결국 굶어서 죽는다고 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앞에서 말한 영업부장처럼, 그리고 날벌레처럼 내가 왜 그 자리에 있고, 또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목적과 방향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87%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도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동시에 일꾼이다. 목적과 방향이 분명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예배를 드리고, 말씀과 기도에 집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본문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일부를 소개하고 있는 말씀이다. 주님은 온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여러 회당에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전도를 하셨다. 본문의 경우도, 전날 주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 장모의 집을 방문하여 그녀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이후 많은 병자의 병과,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다. 그리고 다음 날이 본문이다. 주님은 전날의 수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36). 하루를 기도로 여신 것이다. 주님께서도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셨는데, 우리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당연히 기도로 예배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 때 주님이 기도하신 곳까지 베드로(시몬)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 주님으로부터 절박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자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 장모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주님께서 기도하신 곳까지 찾아와 이 소식을 전했다. 당연히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38a). 내가 곧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찾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다른 마을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과 태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굳이 주님께서 찾아다니시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올 정도면 어느 정도 주님 사역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이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여기저기로 사람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이 익숙하고 편한 곳(안전지대)에서 사역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바라는 바다. 그런데 주님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이다. 편하고 익숙한 안전지대에 머물기를 거부하신 것이다. 이것이 영적 태만, 혹은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비결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복음은 끊임없이 장애물을 뚫고, 경계를 넘어서는 도전 그 자체이다. 이런 모습을 주님의 말씀과 태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다른 하나는, 주님은 사람의 요구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사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 그리고 자신을 찾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나를 찾는 사람과 함께 항상 살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존재의 이유, 삶의 보람을 더욱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사람, 찾는 사람, 곧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다. 어느 모로 보나 몰려온 병자를 고치는 일은 주님께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베드로는 주님이시라면 기꺼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병자를 고쳐주시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은 주님의 태도는 많은 사람이 몰려왔는데, 그들의 관심에서 스스로 멀어지시겠다는 것이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 이유가 38절에 나온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함이고, 또한 주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목적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본문을 보면 지금 제자들이 상당히 고무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37).

 

아무튼 서론에서 말했지만 많은 사람이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특히 잘 나갈 때 목적을 잃고,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면 결국은 무너지게 된다. 배가 바다에서 표류하면 침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일은 주로 모든 것이 잘 되고 잘 나가서 승리에 도취되었을 때, 혹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환호와 주목을 받을 때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주님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도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한 곳에 머물며 찾아오는 사람을 상대하기보다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곳으로 사람을 찾아다니며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오셨다. 본문에서 잘 차려진 밥상을 뒤엎고 다른 마을들을 향하여 가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를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본문에 주님께서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 나온다. ‘새벽 아직 날이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 주님의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주님은 아무리 바빠도 새벽에 기도부터 하셨다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에 기도부터 하셨다기도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장소를 따로 떼어놓고,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교제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새벽기도다기도의 깊이는 영성의 깊이와 같다기도의 넓이는 사역의 넓이와 같다새벽에 나와 깊은 기도하고새벽부터 기도의 양을 늘리기를 바란다. 어떤 분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를 무속신앙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다주님은 새벽기도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더욱 중요한 것은 이 새벽기도가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영적 나침판이었다사막을 성공적으로 건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나침판을 가진 것이다. 사막과 같은 인생길에서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영적 나침판이 있어야 한다. 그 영적 나침판이 곧 기도. 특히 새벽기도. 본문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었던 결단과 힘이 기도에 있었다. 잘 아는 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에서도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에 우편에 있던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을 때 기꺼이 받아주셨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비결이 기도생활에 있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이 말씀은 단지 주님께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 여기에 우리 교회가 세워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잊지 말고 기억하자! 우리가 이를 위해 구원을 받았고, 우리 기뻐하는교회가 여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면 기도에 깨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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