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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보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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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062회 작성일 24-07-0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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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보답할까?

116:12~14

2024. 7/7. 11:00(성령강림 여덟째 주일, 맥추감사주일)

기도할 때 감사의 문이 열린다.

유명한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리버의 말이다. ‘고전13장은 성도가 사는 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 세 가지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공자는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유형을 네 가지로 말한 바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한 것처럼 행동한 사람, 둘째는 앞에서는 달콤한 말로 칭찬하면서 뒤에선 험담한 사람, 셋째는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다. 리버의 말처럼 우리 인생에서 꼭 더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 성도는 더욱 그렇다. 감사는 영적 감수성이고, 영적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는 언제 시작될까? 본 시편에 따르면, 감사는 기도와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감사는 기도로 시작된다. 시인의 고백이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평생의 삶 전체를 기도로 채우겠다는 결심이다. 그 이유는 인생이 지옥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려 그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평생 기도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드릴수록 이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때문에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더 기도를 드리지 않게 되고, 기도를 드린 사람은 더 자주 더 많이 기도를 드리게 된다. 시인의 고백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평생기도를 드리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기도를 드릴수록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란 것을 새록새록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감사로 이어졌다. 그러니 기도를 드릴 때 감사의 문이 열리고, 기도를 드릴수록 감사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기억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도를 드릴수록 하나님께서 내 인생 굽이굽이마다 동행하시고, 이끄시고, 선대하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사랑을 기억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신지를 기억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나게 하고, 기억하게 만든다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기억, 하나님과의 추억 만들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기도다.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분은 주님과의 어떤 기억이 있고, 어떤 추억이 있는가? 감사한다는 것은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이고, 어머니께 감사한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이다. 아내나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것 역시 사랑의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과의 추억, 주님과의 기억이 많은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 있는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존재가 된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추()억이 없는 메마른 사람이다.  

 

구원의 잔을 들고

그러므로 감사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기억이 있는, 곧 추억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13). 여기서 구원의 잔을 든다.는 것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마음껏 표현하는 행동을 뜻한다. 구원의 은혜, 구원의 기쁨, 구원의 감격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결심이다. 도대체 그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무엇이기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하는 것일까? 본문의 앞부분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시인은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고 말한다(3). 그 환난과 슬픔이 얼마나 심하고 고통스러웠던지 그것을 스올의 고통에 비유하고 있다. 스올은 음부와 지옥을 의미한다. 심각한 고통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이다. 또 그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한다(8). 이 외에도 지키시고, 어려움에서 구원하시고(6), 후대하셨다고 말한다(7). 반면에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떠났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외쳤다(11). 이는 사람에 대한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다. 아무튼 죽을 위기에 처해 지옥과 같은 고통을 당하며 슬픔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다 자기를 떠났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지키시고 구원하시고 후대하셨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 은혜를 기억하니 너무 감사해서 무엇으로 보답하고, 어떻게 보답할까 외치게 된 것이다.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감사의 사람인 것 같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항상 은혜의식, 보은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12). 이것이 은혜를 아는 사람의 모습이고 태도다. 살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많고, 너무 크고, 한이 없어서 도대체 무엇으로 보답하고,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우리 찬송가에도 비슷한 고백이 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적인 고백이다. 그러면서 그는 은혜에 대한 보답의 방법으로 거듭 두 가지를 결심한다. 하나는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것이고(13,17),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백성 앞에서 자신의 서원을 갚겠다는 것이다(14,18).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13).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7).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는 말씀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다. 특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뜻의 관용적인 표현으로 성경에 자주 나오고 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12:8, 13:3,4 참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은 부른다는 것은 받은 은혜를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누고, 그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른 말로 전도, 혹은 선교라고 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확장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는 모든 경건생활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생활은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보좌를 들썩이게 하는 감격스러운 찬양,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헌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한다.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극대화시킨다.

 

나의 서원을 갚으리로다.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백성 앞에서 서원을 갚는 것이다.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4). 비슷한 말씀이 18절에 반복되고 있다. 본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어떤 서원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본 시편이 이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일반화를 시키면 시인이 서원한 내용을 대충 짐작은 할 수가 있다. 우리도 은혜를 받으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 섬기겠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겠다고, 예배생활에 충실하겠다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활을 정리하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다짐을 한다. 소위 경건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잘 실천해서 좋은 성도가 되겠다는 다짐과 약속이다. 사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이런 다짐과 약속을 실천하는 것을 당연하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한 것이 모든 백성 앞에서, 혹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다짐과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공개적으로 실천하며 살겠다는 의미다. 모든 사람이 보고 알 수 있도록 당당하게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변화를 싫어하고, 또한 인간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윤형본능). 우리가 년 초에 많은 결심을 하지만 금방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경우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대로 살려면 주기적으로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반성과 성찰을 거듭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매일 새벽, 수요일, 그리고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경건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맥추감사절이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새로운 절반을 시작하는 주일인 것이 의미가 깊다. 구원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여러 힘들고 어려운 사건사고의 홍수 속에 살다보니 잊고 살기가 다반사고, 감사대신 불평에 휘둘리게 된다. 이런 우리의 삶에 불평을 포맷시키고, 감사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이 맥추감사주일이다. 이 뜻깊은 날에 지난 반년동안 구원의 은혜를 비롯하여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보고, 남은 반년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시인처럼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께 약속했던 것들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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