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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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852회 작성일 24-06-30 14:24본문
채워주는 사람
빌2:25~30
2024. 6/30. 11:00(성령강림 일곱째 주일)
냉수와 같은 사람, ‘에바브로디도’
본문에 따뜻한 난로와 같고, 편안한 의자와 같고, 시원한 냉수와 같은 사람이 나온다. 흐뭇하게 시원하게 풍요롭게 불끈 힘이 솟게 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역자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다.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은 ‘사랑스러운’이란 뜻으로 로마제국시대에 흔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orodite)에서 온 것인데, 아마도 그의 부모가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그가 예수님을 믿어 그가 섬기는 빌립보교회와 바울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이는 그가 주님께 사랑과 존중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빌립보교회를 대신하여 감옥에 있는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 로마까지 왔다가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를 아주 극진하게 소개를 하고 있다.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25). 그가 이렇게 그의 영적 스승인 사도 바울과 섬기는 교회 지체들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 이유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
장자(長子)의 말이다. ‘작은 주머니에는 큰 것을 넣을 수가 없고, 짧은 두레박줄로는 깊은 우물의 물을 퍼 올릴 수가 없다. 이처럼 그릇이 작은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릇의 크기는 곧 마음의 크기다. 마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지식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의 됨됨이, 곧 마음 씀씀이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자신을 뒤로 물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배려가 깊은 사람, 손해를 보더라도 모두를 위할 줄 아는 사람,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다. 타인 먼저, 주님 먼저가 일상화가 된 사람이다. 에바브로디도가 이런 사람이다. 그는 빌립보교회를 대신하여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도우려왔다 죽을병에 걸렸다(27). 그런데 그는 그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안위보다 교회 지체들을 먼저 생각했다. 자기로 인하여 지체들이 걱정할까 염려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26).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다. 아름다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지경인데, 그 순간에도 자기로 인하여 상처를 받거나 실족한 사람이 있을까 걱정한 것이다. 자나 깨나 지체들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힘들면 주변을 탓하거나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군자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 힘들다고 하늘을 원망하거나 특히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군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원망을 넘어 상대방을 걱정한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 성숙한 인격이다. 이런 그의 모습에 감동한 바울은 그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빌립보교회로 보내면서 이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이런 아름다운 마음과 태도를 그대로 빌립보교회에게 전하면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하였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
주님의 일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연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개미집에 불이 났는데, 개미들이 불에 자신의 몸을 던져 불을 끄는 것이었다. 미물인 개미도 불을 보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미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리고 이를 온 몸으로 실천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의 희생이 나를 비롯하여 온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성도인 우리가 따라야할 삶의 모범이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게 에바브로디도를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한 또 하나의 이유다. 주의 일에 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주의 일에 헌신하고 희생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30).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에게 주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충성스러운 사람, 주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이다. 믿음은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때문에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꼭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최근에 주님을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을 했는가?’ ‘나는 주님을 위해 어떤 눈물과 땀을 흘리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지,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졌었는지, 어떤 좋은 대학을 나왔는지, 이런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얼마나 눈물과 땀을 쏟았고,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하였고, 얼마나 충성하였느냐를 볼 것이다. 앞에서 말한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헌신과 희생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①지체들에게 환영을 받게 되고, ②지체들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고, ③문제(질병)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에바브로디도가 그 증인이다.
옛날에 프랑스 어떤 시골에서 주민이 전체 회의를 열었다. 복음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공동기금을 모아서 이웃사랑을 실천하자는 주제로 열린 회의였다.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차 두 대 가진 사람은 마을에 한 대를 기증합시다.’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제안했다. ‘마차만 있고 말이 없으면 안 되니까 말을 두 마리 가진 사람은 한 마리씩 기증합시다.’ 이 제안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세 번째 제안이 나왔다. ‘말과 마차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하니 창고를 두 개 가진 사람은 한 개를 기증합시다.’ 이 제안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어나 말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마을을 위해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도 뭔가 참여하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닭이 두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를 기증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닭이 두 마리 이상 있다면 한 마리씩 내놓읍시다.’ 그 제안에 투표를 한 결과, 제안자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반대해서 부결되었다. 왜 그랬을까? 말이나 마차나 창고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닭은 마을 사람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김의 중요성, 필요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희생이나 헌신은 구호가 아니다. 구체적인 실천이다.
taker, matcher, giver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taker), 받는 만큼 주는 사람(matcher),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giver)이 그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는 사람(giver)이 더 잘되고 형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주님 앞에서는 강하고 독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는 ‘승자독식’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또 착한 사람은 이용만 당할 뿐 성공하기 어렵다는 불문율도 사라지게 된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쁜 중에도 누군가를 돕고, 먼저 배려하고,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며 희생하고, 남의 부족을 채워주는’ 사람(giver)이었다. 사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이런 사람을 통해 든든하게 세워지고, 회복이 되고, 부흥하게 된다. 선한 영향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게 된다. 성도는 이런 사람을 알아주고,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그와 같은 사람이 많이 탄생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6년 반이라는 짧지 않는 시간을 김정희 전도사님과 함께 했다. 여러분이 익히 경험해서 잘 알겠지만 김 전도사님이야말로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먼저 배려하고, 바쁜 중에도 돕는 일이라면 솔선수범하고, 남의 부족을 채워주려고 애쓰고, 특히 주님과 주님의 일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소중한 사람과 사역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계속 할 수가 없어 유감이다. 그렇지만 그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준 이런 멋진 신앙의 삶을 기억하며 본받아 살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5PhaP1G0LqY 793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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