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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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932회 작성일 24-03-10 14:04본문
주님의 마음을 주소서!
마4:23~25
2024. 3/10(사순절 넷째 주일). 11:00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를 볼 수 있다. 나이테는 나무의 단면이지만 거기에는 나무의 역사와 여러 정보가 담겨있다. 몇 년 됐고(나무의 수령), 주변 환경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다. 나무가 자란 곳이 비탈이었는지, 평지였는지, 토양의 상태는 어떠했는지, 주변에 장애물이나 다른 나무가 많았는지 없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나무가 자란 주변의 환경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언제 비가 많이 오고, 언제 심한 가뭄이 있었는지 등 나무가 자랄 때의 기후도 알 수가 있다.
본문은 마치 나이테와 같다. 비록 짧은 내용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즉, 공생애 동안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23). 그것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일이다. 흔히 이를 ‘주님의 3대 사역’이라고 부른다. 어떤 분은 이와 같은 주님의 사역이 인간의 영과 혼(정신)과 육, 이 세면과 관련이 깊다고 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정신(혼) 곧 인격의 변화를 위해 가르치셨고, 몸의 구원을 위해 고치셨다는 것이다. 흥미 있는 주장이긴 하나 구원은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것이기에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흔히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을 주님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삶과 사역을 본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주님의 3대 사역은 우리가 따라야 할 주님의 삶과 사역이다. 이를 성도의 사명, 혹은 교회의 사역이라고 한다. 이 시간 주님의 이 3대 사역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주님의 3대 사역
이미 확인한 것이지만 본문이 소개한 주님의 사역은 크게 3가지다. 그래서 이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님의 3대 사역’이라고 부른다. 첫째가 ‘가르치심’(teaching)이고, 둘째는 ‘전파하심’(preaching)이고, 셋째는 ‘고치심’(healing)이다. 사실 이 3가지는 ‘복음’을 지향하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 곧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주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만 몰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 거기에 가치를 두고, 소망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역이었다. 주님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일로 이 사역을 담당하신 것이다.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특히 주님은 탁월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셨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 주님의 가르침이 당대의 뛰어난 교사들과 달랐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주님을 ‘랍비’(선생님)라고 불렀다. 복음서에서 주님을 선생(랍비)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자주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주님은 본문에 나온 대로 온 갈릴리 지역의 각 회당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후에는 유다지역의 온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기회 있는 대로 가르치셨다(9:35). 우리는 이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고, 그 나라를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또한 주님처럼 가르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미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고 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삶을 살려면 먼저 배워야 한다. 잘 배워야 잘 가르칠 수가 있다. 물론 이 말이 당연한 하지만 여기에 역설이 작용한다. 그것은 가르치는 것이 가장 잘 배우는 길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것으로 그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운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지만 배운 것을 가르친 사람은 배움이 더 확실해지고, 또한 확장된다. 이것을 학술적으로 증명한 것이 ‘학습 피라미드’(Learning Pyramid)다(자료준비). 미국 국립행동과학연구소(NTL)에서 제시한 교육이론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방법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교육 전문가 에드가 데일(E. Dale)이 그의 저서「교육의 시청각방법」(Audio-Visual Method in Teaching)에서 ‘경험의 원뿔’(Corn of Experience)로 최초 제시한 것이다(1954년). 이것을 NTL에서 추가로 연구하고 개발하여 학습 피라미드가 된 것이다. 이 표에서 배움에 압도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다음이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 학습이론이지만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신앙생활도 수동적으로 듣기만 해서는 영적 진보(성숙)가 더디다. 배운 것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람이 영적 성장과 성숙이 매우 빠르다. 교회학교 교사나 구역장, 권찰을 맡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신앙의 성숙이 빠른 것도 같은 이유다. 그래서 성경이 실천을 강조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삶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다. 제자는 스승의 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선 잘 알아야 한다. 잘 알려면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그 비결이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특징
본문은 주님의 사역과 함께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23a). 여기에 사역의 중심지와 장소, 방법이 나온다. 사역의 중심지는 ‘갈릴리’였고, 장소는 ‘회당’이었다. 그리고 방법은 사람이 찾아오도록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다니는’사역이었다. 먼저, 주님이 사역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삼으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9:1). 동시에 주님의 관심과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복음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당시 갈릴리는 멸시를 받은 소외의 땅이었고, 갈릴리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지칭하는 관용어였다(행2:7).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 사회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즉, 소외의 땅 갈릴리처럼 낮은 곳, 멸시의 대상이 된 갈릴리 사람처럼 낮은 사람에게로 향하는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사역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성도와 교회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사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회당을 사역의 장소로 삼은 것은 사람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당시 회당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었다. 게다가 주님은 랍비였기에 어느 회당에서나 가르칠 수가 있었다. 주님은 이를 십분 활용하신 것이다.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인 회당과 회당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잘 선용하여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사역에 집중하셨다. 물론 이것은 공생애 초기만 그랬고, 주님의 인지도가 높아진 후에는 사역의 중심이 갈릴리에 유다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사역의 장소도 회당뿐만 아니라 가정 집, 바닷가, 선(船)상, 산(山)상, 빈들, 길거리로 확장이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기회를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의 장소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주어진 모든 기회를 잘 선용하여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데 모두 쏟아 붓기를 바란다.
주님 사역의 동력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르침과 전파와 치유(사랑하고, 존중하고, 섬기는 것)의 방법이다. 그것은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다니셨다’는 점이다.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이런 모습은 주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다. 그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9:35~36절에도 나온다. 거기에 보면 주님께서 두루 찾아다니신 이유가 나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36). 그것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은 그들이 목자가 없는 양처럼 고생하고 기진했기 때문이다. 양에게 목자는 절대적인 존재다. 양은 목자가 없이 생존 불가능한 존재다. 당시 사람들의 형편이 그랬다는 것이다. 주님이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이런 그들을 찾아 두루 다니신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주님 사역의 동력이었다. 복음서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이와 같은 마음이 자주 표현되고 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을 때,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행렬을 보셨을 때, 굶주린 무리를 보셨을 때,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비통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셨을 때,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고쳐주시고, 먹여주시고, 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을 보내주실 때도 같은 마음이셨다(요3:16). 이런 주님의 마음이 그들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두루 찾아다니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연약한 것을 도우셨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곧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가 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고, 주님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실천할 수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마음으로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삶을 살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hebvLgpmQ4c 135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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