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함으로 성장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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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194회 작성일 24-01-21 13:51본문
경외함으로 성장하는 교회
행9:31, 삼상2:22~26
2024. 1/21. 11:00
엘리의 아들들
본문은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등장하기 전, 이스라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혼란한 사사시대의 말기다. ‘여호와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그 시대에 대한 성경의 평가다. 그리고 그 시대에 최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람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다. 성경은 엘리의 아들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2:12). 제사장의 아들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그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이와 같은 모습은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반영해준다. 그들의 나쁜 행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 영적 타락에는 도덕적 타락이 반드시 따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은 제사장의 자식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다(2:30). 한 마디로 그들에겐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2:17), 회(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을 범하는 악한 짓, 망나니짓을 일삼은 것이다(본문 참조). 게다가 아버지가 간곡하게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안했다.
주인이 없으면 일군은 헐망(딴전)을 부리고, 담당교사가 없으면 교실은 난장판으로 바뀐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이 없으면 못할 것이 없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이렇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함이 없으니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산 것이다. 이런 그들의 태도를 두고 본문은 이렇게 경고를 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5b). 그리고 이 말씀대로 엘리와 그 아들들이 한순간에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다. 4장에 그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이스라엘과 불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크게 패하여 4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전장으로 나가자고 제안을 했고,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를 대신하여 그의 두 아들이 언약궤를 메고 전장으로 나섰다. 애석하게도 불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도 빼앗기고, 언약궤를 메었던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엘리는 충격을 받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임신 중이던 며느리가 남편의 죽음소식과 시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출산을 하다가 죽었다. 죽어가는 그녀에게 곁에서 누군가가 아들이라고 말하자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외치며 숨을 거뒀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곧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 사람의 최후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이 여기리라.’(삼상2:30).
경외(敬畏)와 경배(敬拜)
경외(敬畏)는 성경에 자주 나온 단어 중에 하나다. 히브리어로 ‘경외하다.’를 ‘야레’(יָרֵא)라고 하는데, ‘두려워하다.’가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바른 자세를 말하는 문맥에서는 ‘존중’, ‘존경’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창42:18, 출1:17, 레19:14,32, 신6:2,24, 시33:8 등). 그러므로 경외란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것,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 또는 함부로 여기지 않고 높이고 받드는 마음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이자,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성경에서 경외라는 단어와 함께 자주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경배’(敬拜)다. 이를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라고 하는데, 이는 ‘~를(을) 향해’, ‘~앞으로’를 뜻하는 ‘프로스’(πρός)와 ‘입맞추다.’는 뜻의 ‘퀴네오’(κυνεω)가 합쳐진 것이다. 존경의 표시로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는 학자도 있고,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춰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을 뜻한다는 학자도 있다. 기본적인 의미는 ‘무릎을 꿇다.’, ‘숭배하다.’ ‘절하다.’로, 성경에서는 예배와 관련이 깊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경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예배와 관련하여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굳이 둘을 구별한다면 경외는 예배자의 마음가짐에 가깝고, 경배는 예배자의 행위(태도와 자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경외함이 있어야 올바른 예배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경외함은 예배를 통해 시작이 된다. 예배를 통해 경외함이 생기고, 경외함을 통해 예배가 완정이 된다.
경외함은 예배를 통해 시작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며느리가 있었다. 어떻게 시어머니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죽일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용한 무당을 찾아갔다.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시어머니를 아무도 몰래 죽일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러자 무당이 그 비방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앞으로 백일동안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면서 매일 시어머니에게 떡을 해드리라고 했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다. 신이 난 며느리는 다음 날부터 떡을 해서 시어머니에게 드렸고, 며느리의 이상한 행동에 시어머니는 더욱 화를 내며 욕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어머니가 아무리 욕을 해도 며느리가 대꾸도 않고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면서 매일 떡을 해드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도 며느리가 여전했다. 그러자 며느리를 대하는 시어머니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만나는 사람에게 며느리 자랑을 했다. 며느리 역시 이런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더 없이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백일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죽으면 어쩌나! 시어머니를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며느리는 무당을 찾아가 울면서 시어머니를 살릴 방도가 없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당이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바뀌었으니 죽지 않는다.’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세상사가 그렇지 않다. 하기 싫은 일, 그럼에도 꼭 해야만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하다보면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참 잘했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신앙생활도 그렇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찬양하고, 예배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선한 것을 싫어하고, 경건한 것을 싫어한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그런데도 이런 마음을 누르고 예배에 참석을 하여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신을 하고, 성도와 교제하며 섬기다보면 경건한 마음,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억지로라도 섬기고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경건한 일을 가까이하고, 또한 힘쓰다보면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형통의 비결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형통’(잘 됨, 번영, 부흥)의 비결이라고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126:1~6). 초대교회의 알찬 부흥도 ‘경외함’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초대교회는 탄생하면서부터 힘써 모이는 교회였다.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모여서 교제를 나누고,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 일은 그들이 핍박으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예배드린 곳이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예배생활은 그들이 얼마나 주님을 경외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형통의 복을 주셔서 핍박 중에도 알찬 부흥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윗의 형통
성경에 사울과 다윗에 대한 이런 평가의 말씀이 나온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다윗은 점점 잘 되고, 사울은 점점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경외함’이다. 다윗은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많은 찬양과 감사와 기도를 남겼다. 특히 그는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의 자리를 갈망했다. 예배를 즐거워했고, 감격스럽게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도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대신 신접한 자를 찾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않았다(대상10:13,14). 그는 40년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단 한 줄의 시도 찬양도 감사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의 삶에서 예배가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에게서 왕권을 빼앗아 다윗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잘 되고, 그 가정과 산업이 번영(창)하고. 그 교회는 알찬 부흥을 하게 된다. 그 열쇠가 예배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예배를 사수하여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자. 예배가 우리를 경외함으로, 경외함이 형통으로 이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이 여기리라.’(삼상2:30). 엘리의 아들들과 사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반면에 다윗과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형통의 복, 알찬 부흥의 복을 경험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uiAIDOpc1Wc 1607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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