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날벼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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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522회 작성일 23-11-12 16:05본문
웬 날벼락이야!
눅13:1~9
2023. 11/12. 11:00(성령강림 후 스물네 번째 주일)
어려움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겹치는 인생의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한 농부가 이웃 마을의 현자를 찾아가 물었다. ‘선생님, 제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겹치는 것일까요?’ 그러자 현자 말했다. ‘가서 세 개의 냄비에 물을 끓이되, 하나에는 당근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달걀을, 그리고 또 하나에는 차를 넣고 끓이게.’ 20여분이 지난 다음 현자가 물었다. ‘각각의 상태는 어떠한가?’ 농부가 대답했다. ‘당근은 물렁해졌고, 달걀은 단단해졌고, 차에서는 좋은 향이 납니다.’ 현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단단한 당근은 끓는 물에 의해 물렁해졌고, 연약한 달걀은 단단해졌고, 바싹 마른 차 잎은 그윽한 향을 토해냈네. 어려움 앞에서 그대는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당근처럼 단단한 사람, 곧 교만하고 완고한 사람을 물렁한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고, 달걀처럼 연약하고 여린 사람을 심지가 견고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만들고, 차 잎처럼 말라비틀어진 사람을 그윽한 향이 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어려움이라는 것이 당장에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인생에 유익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든 유익하도록 선용하라는 이야기다.
참으로 현자다운 멋진 답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는 욥의 고백(욥6:7)처럼 살면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반갑지 않는 손님(불청객)처럼 청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우리의 삶에 끼어들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 어려움을 이와 같은 태도로 바라보고 선용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차분하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고, 이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기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며 탄식하면서 원망하고 낙심하기에 바쁘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보고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답을 찾기보다 비난거리를 찾고, 아주 고약한 사람은 그 불행을 이용하려고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 행세를 하며 정죄하기도 한다. 본문이 그 예다. 다른 사람이 당한 어려움에 대한 태도(자세)에 관한 말씀이다.
날벼락 같은 사건을 보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근래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성경 어디에도, 다른 어떤 기록에도 이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총독 빌라도가 유대를 매우 잔혹하게 통치를 했고, 로마에 항거하는 유대인, 특히 과격한 갈릴리 ‘혁명당원’(눅6:15)은 무력항쟁으로 ‘독립투쟁’을 벌이곤 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아마도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에 거사를 계획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혁명당원이 성전에 들어가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핑계로 총독 빌라도의 특전대가 성전을 급습하여 그들을 그곳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피를 제단의 희생제물에 뿌렸다. 이방인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성전에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은 유대인은 물론, 특히 갈릴리 사람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희생당한 사람 중에 혁명당원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끔찍한 참사가 성전에서 일어났고, 이로 인해 거룩한 제사가 더럽혀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그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일어난다. 몇 년 전 일이지만 어느 성도가 새벽예배를 다녀오다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열심이 많은 젊은 주부였다. 뒤로 남편과 어린 두 자녀까지 둔 사람이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고가 난 것도 경건한 삶을 위해서 힘쓰던 때였다. 또한 자가용 택시로 영업을 하던 어느 교회 집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나중에 온몸이 난자당한 채로 숨져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교회에서 찬양지휘도 하고, 여러 모로 헌신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 많은 사람이 두 가지의 생각을 한다. 하나는 당사자에게 의구심을 갖는다. 겉으로만 척했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이다. 대형 참사나 재난, 또는 역병이 번질 때 인과응보와 하나님의 심판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면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냐는 것이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주님께 이 사건을 이야기한 것 같다. ‘그들이 죄를 지은 까닭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신 것이다.’ 주님의 반응에서 이를 엿볼 수가 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솔직히 우리는 이런 재난소식을 접하면 난처한 입장에 빠진다. 우리야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주변에서 악의를 품고 내뱉는 말에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성도에게 닥치는 이런 불의의 재난이나 참사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이에 대한 답을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갈릴리 사람들의 참사소식을 듣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 그들의 죽음이 그들이 남보다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예를 하나 드셨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 예루살렘은 해발고도 약 760m 시온산 정상에 세워진 도시다. 천혜의 요새였으나 물이 귀했다. 성 밖 동쪽 기드론 골짜기의 샘이 유일한 수원이었다. 그래서 히스기야 때 인공수로를 만들어 물을 기드론 골짜기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왔다. 그 물을 모아둔 곳이 실로암 저수지(샘)이고, 거기에 망대를 세우고 지키게 했다. 어느 날 그 망대가 무너져 거기 있던 사람 18명이 압사를 당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죄가 많아 변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갈릴리 사람들의 참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실로암 망대에서 죽은 사람들이 죄가 많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주님은 불행한 사건사고를 대할 때 어떤 종교적인 전제를 가지고 사고 당사자나 주변에서 그 원인을 찾아 정죄를 하거나 탓하는 것을 몹시 경계하셨다. 주님 당시까지도 인과응보적인 세계관에 종교적인 신념이 더해져 질병을 비롯한 인간이 겪는 불행한 모든 사건사고는 죄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심판(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경계하신 것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2b,4b). 인과응보적인 고정관념이나 종교적인 전제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겸손하게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것을 촉구하셨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5).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신 말씀이 ‘회개’다. 이 회개는 날벼락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정죄하는 독선, 곧 하나님 행세하는 위선과 외식을 버리라는 뜻이다. ‘저들은 죽을 짓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자칭 의인의식(독선)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사건사고를 다른 사람을 판단의 도구로 삼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즉, 자신을 살피며 회개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비극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다. 그들 탓만 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지 말고 나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봐주셔서 이렇게 평안한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죄는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도 그 대상이 될 수가 있다.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죽음이라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회개 없는 죽음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금년에도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청주 오송 지하도 참사사건이 가장 끔찍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나 역시 언제든지 이런 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덤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 비유다(6~9).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고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무화과나무가 심판의 도끼, 심판의 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포도원지기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8). 이 무화과나무가 곧 우리의 모습이다. 이미 심판을 받아 마땅한데 포도원지기이신 우리 주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덤으로 사는 것’이다. 일종의 기회인 것이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다.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 중에 최상의 열매는 회개의 열매다. 죄를 깨닫고 죄와 싸워서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회개가 쉽지 않다. 이전에 가던 길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와 멀어지기 어렵다.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오히려 죄를 쌓고 있는 경우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기회를 주시되 회개할 여건까지 함께 주셨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것’이 그것이다. 때로는 고난을 당하게도 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게도 하신다. 다니엘 기도회와 같은 영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신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압사당한 사람들과 같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회개를 위한 영적 신호탄이다. 아무튼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선용하여 회개하기를 바라신다. 회개해야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기회도 마찬가지다. 기회가 있을 때, 아직 길에 있을 때,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qLZUB1GsuXo 287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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