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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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9,155회 작성일 22-12-18 13:45본문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기쁨’
행2:46
2022. 12/18. 11:00
초대교회의 암호
10여 년 전에 어느 기업 관리실(SK 브랜드 관리실)에서 20~50세의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웃음에 관한 라이프 스타일〉을 설문조사했다. 그리고 사람의 수명을 80세로 가정하고 환산한 통계를 발표했다. 이 통계에서 눈이 띄는 것이 하루 평균 걱정(근심)하는 시간과 하루 평균 웃는 시간이었다. 하루 평균 걱정하는 시간은 약 3시간(80년 중에 10년, 잠자는 시간 26.6년을 빼면 인생 1/5을 걱정하며 보냄)이고, 반면에 하루 평균 웃는 시간은 약 86초(80년 중에 30일)이었다. 웃는 시간보다 걱정하는 시간이 130배나 많다. 성인이 하루 평균 10번을 웃는다고 한다. 한 번 웃을 때 8.6초,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는 사람이 조사대상 중 1.8%였다. 500명 중 9명은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녀로 구분했더니, 남자는 2시간 30분, 여자는 3시간 30분을 걱정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1시간을 더 걱정한 것이다. 연령별로는 20대가 3시간 15분, 30대 3시간 7분, 40대 2시간 50분으로 나왔다. 나는 40대가 가장 많을 줄 알았는데 20대가 많았다.
정신병자 중에는 암이 없다고 한다.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인은 3~4명 중에 한 명이 암이라고 한다. 걱정이 많기 때문이다. 걱정하면 인생을 도둑맞는다. 내일을 염려하면 오늘을 도둑맞는다. 내일을 걱정하면 오늘을 빼앗긴다. 걱정은 인생을 빼앗아가는 도적이다. 이 도적을 막는 비결은 기쁨이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걱정 없는 사람은 없다.’ 맞는 말이다. 걱정 없는 사람, 걱정 없는 시대, 그리고 걱정 없는 곳은 없다. 굳이 있다면 공동묘지다. 이 세상은 걱정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최고의 기쁨을 소유한 곳이 있었다. 바로 ‘초대교회’다. 당시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지배를 받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웠다. 또한 신앙 때문에 여러 불이익을 받았다. 삶 자체가 걱정덩어리였다.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기뻐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다. ‘기쁨은 초대교회 성도의 암호다.’ 기쁨이 자기들만이 통하는 암호가 될 정도로 아주 큰 기쁨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이 이웃에게는 칭송을 받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어 구원받은 사람이 날로 더하여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걱정과 근심 많은 세상에서 기뻐함으로 주님께 기쁨이 되었던 초대교회처럼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열네 번째 ‘기쁨’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도의 기쁨
하여간 초대교회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크게 기뻐하였고, 그래서 그 기쁨이 그들만이 통하는 암호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기쁨이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상황으로만 보면 그들은 결코 기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본문에 나온 기쁨이란 단어가 특별하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 여기에 나온 기쁨은 헬라어로 ‘아갈리아시스’(αγαλλιασις)다. 신약성경에는 기쁨을 표현하는 주요단어로 세 개가 나온다. 첫째가 ‘카이로’(χαί́ρω)이다. 이는 가장 자주 사용되고 있는 단어로 신체적 평안과 안녕이 기쁨의 토대를 이룬다. 흔히 말하는 소유적 만족감, 성취적 만족감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주고받는 인사로 사용했다. 이러한 인사는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표현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것이 자기에게 있어 주기를 바랐다. 둘째는 ‘유프라이노’(εὐφραίνω)다. 이는 기쁨의 주관적 감정을 가리킨다. 유쾌하거나 기분 좋은 분위기 같은 상황, 곧 잔치나 축제 등에서 먹고 마시는 육체적인 즐거움을 뜻한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눅12:19). 여기서 즐거워하자가 곧 유프라이노다.
그리고 셋째가 본문에 나온 기쁨이란 단어의 동사형 ‘아갈리아오’(αγαλλιαω)다. 이는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축하고, 또한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대해주실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찬양하는 제의적 축제의 기쁨을 뜻한다. 즉, 공적 예배에서 맛보는 ‘환희’를 가리킨다.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너무 기뻐서 미칠 지경인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인간 전체를 사로잡는, 인간의 근본적 기쁨의 감정이다. 이 기쁨은 말과 몸의 움직임까지 동원하는 큰 기쁨이고, 속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쁨이다. 즉, 차고 넘쳐서 밖으로 나오는 기쁨이다(좋은 예가 언약궤를 모신 다윗의 태도). 바로 이 동사에서 본문에 나온 ‘기쁨’이란 뜻의 아갈리아시스라는 명사가 나왔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과 이를 의존하고 있는 기독교 저술가들의 저서에서만 나온다. 이는 곧 성도의 기쁨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초대교회가 이런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이는 순전히 ‘성령님의 역사’다.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61:1~3).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기쁨이 있고, 성령께서 기쁨을 주신다는 것이다. 즉, 기쁨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기쁨은 성령의 작용으로 생기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하면 성령께서 작용하여 기쁨이 샘솟게 된다. 안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도록 솟구쳐 나오기 때문에 상황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초대교회가 그랬다. 그들은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뻐했다. 그래서 기쁨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암호가 되었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삶을 단편적이나마 잘 보여주는 사건이 행5장에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웠다. 그렇지만 가말리엘의 충고로 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금하면서 채찍질을 하고 풀어주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부당한 일을 받은 그들의 태도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그들은 매를 맞고도 싱글벙글 웃었다. 결코 기뻐할 상황이 아닌데 기뻐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의 작용으로 기쁨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도, 가질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한다. 세상이 알지도 못한 신령한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성령의 능력으로 모인 곳에, 모인 사람에게 충만하게 부어진다. 성령 안에서 배우고, 교제하고, 거룩한 떡을 떼며, 성령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초대교회가 그랬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이유가 42절에 나온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래서 그들은 이와 같은 기쁨을 가졌고, 이 기쁨이 그들의 영성이고, 중요한 드레이드 마크였다. 그렇다. 성도의 기쁨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기쁨, 주님께 예배드리는 기쁨, 주님의 몸인 교회에 모이는 기쁨, 몸의 지체인 성도와 교제의 기쁨, 기도하고 찬양하는 기쁨,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기쁨이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를 가까이 하고, 성도를 가까이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예배를 사모하고,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성령의 선물이다. 기쁨이 주님께 기쁨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이 중요하다.
동시에 기쁨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기쁨의 공동체인 동시에 성령공동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주님이 계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성도에게 기쁨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의 사람인 것을 단번에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뻐하는 삶 자체가 좋은 ‘전도’라 했고, 또한 기쁨을 ‘깃발’에 비유하기도 했다. 지금도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나 왕궁이 있는 나라를 가보면 왕이 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깃발로 표시를 한다. 왕이 궁에 있으면 깃발을 내걸고, 출타 중이면 깃발을 걸지 않는다. 기쁨이 곧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쁨이 있다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마음에 계신다는 증표다. 때문에 성경은 기쁨을 강조한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주 안에서 하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기쁨과 더불어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보물이 있으면 그것을 훔치려는 도적이 있다는 점이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사단이 우리를 걱정스러운 상황으로 자꾸 몰아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초록 심술쟁이 괴물 ‘그린치’처럼 우리의 기쁨을 도적질하기 위해서다. 이런 사단의 노림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 비결은 주님께 우리의 관심을 온통 쏟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사이러스’(성경은 고레스로 표현) 왕이 전쟁에서 적국 왕자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왕이 그 왕자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그대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대의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재산을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대의 아내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제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아 그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살아 돌아온 왕자는 너무 기뻐서 축하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고레스는 참으로 훌륭했소. 정말 잘 생겼고, 의젓하고, 늠름하고, 장수답고, 사나이다웠소.’ 이렇게 말하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럼 뭘 봤소?’ ‘저는 저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고 말하는 한 남자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보는 동안에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yRbbiDK_-J0 5152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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