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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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652회 작성일 21-07-12 12:17본문
열어주소서! ‘눈Ⅺ’
잠22:9
2021. 7/11. 11:00
눈은 마음의 창이다.
탈무드에 나온 이야기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그의 다섯 제자와 나눈 대화다. 사람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지 한 가지 씩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각각 ‘선한 눈, 좋은 친구, 좋은 이웃, 현재하는 행동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를 미리 보는 눈, 선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자 자카이는 ‘선한 마음이 가장 옳다. 다른 것은 모두 선한 마음에 포함된다.’고 했다. 다음에는 사람을 가장 나쁘게 하는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 제자들은 ‘악한 눈, 나쁜 친구, 나쁜 이웃, 꾸어가고 갚지 않는 것, 나쁜 마음’이라고 했다. 자카이는 ‘나쁜 마음이 답이다. 모든 것은 나쁜 마음에 포함된다.’고 했다. 중요한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15:16~20).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각’활동이 아니라 ‘마음’활동이다. 그래서 눈을 ‘마음의 거울’, 혹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 것이다. 보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알 수가 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대부분 그 사람의 단점을 보지 못한다. 누군가를 싫어할 때는 그 사람의 장점을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마음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것만 보이고, 싫은 사람은 결점만 보이는 법이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마음이 슬픈 사람은 세상을 온통 잿빛으로만 본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세상이 온통 나를 축복하고 축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눈’관리가 ‘마음’관리다. 아니, ‘마음’관리가, 곧 ‘눈’관리다. 마음은 눈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선한 눈
사람의 눈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선한 눈’과 ‘악한 눈’이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은 선한 눈을 만들고, 악한 마음은 악한 눈을 만든다. 이 표현이 성경에 몇 번 나온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여기서 ‘선하다.’는 것은 인색함이 없는 넉넉한 마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선한 눈을 가진 사람’은 인색함이 없는 넉넉한 마음, 너그럽고 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이를 영어로 ‘제네러스’(generous)라고 한다.
그러면 선한 눈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본문은 ‘선한 눈을 가진 자’와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와 나눌 줄 아는 것이 바로 선한 눈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라고 뜻한다. 즉,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의 실천을 통해 선한 눈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눔은 마음의 문제다. 많이 가졌다고 잘 나누는 것이 아니다. 선한 마음, 곧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에서만 나눔의 행위가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태도가 바로 우리의 선함을 시험하는 것이다. 즉, 선한 마음, 선한 눈의 시금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어려운 이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고통을 주목하는 눈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눈이다. 우리 눈에서 흐르는 어려운 이웃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야말로 세상의 먼지를 씻는 청량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선한 눈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쁨이 되고, 세상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눈
반면에 ‘악한 눈’, ‘나쁜 눈’이 있다.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지어다.’(잠23:6).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신15:9). 여기서 ‘악한 눈’은 ‘선한 눈’의 반대다.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궁핍한 형제를 보고도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인색한 ‘구두쇠’(miser)를 뜻한다. 유대인의 격언에 나온 말이다. ‘100명이 죽는다면 99명은 악한 눈 때문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자연사다.’ 인색함을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다루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을 하지 못한 인색한 사람은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눅16장에 나온 <나사로와 부자>비유에서 부자가 이에 속한 사람이다. 자신은 호의호식하면서도 자기 집 문밖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나사로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무관심을 넘어 외면을 했다.
우리말에 ‘흉안’(凶眼)이란 말이 있다. 재앙을 부르는 눈이란 뜻이다. 이 흉안은 질투와 시기의 상징으로, 남의 성공이나 장점을 시기하여 재앙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성경은 악한 눈을 인색함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눈으로도 말씀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창4:5). 탈무드는 안색이 변했다는 말을 악한 눈으로 바라봤다고 해석하고 있다. 가인의 눈을 이렇게 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질투심이었다. 시기와 질투가 곧 악한 눈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사람, 욕심이 많고 인색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은 물론 건강한 관계, 건강한 공동체를 해치는 암(癌)과 같은 존재다.
두 개의 눈을 주신 것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을 주신 것일까? 아마도 세상과 사람, 사물을 넓게 균형 있게 바라보라는 의미에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 철학자인 볼테르가 이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사람에게 두 개의 눈이 있다고 해서 그 만큼 더 조건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한 쪽 눈은 인생의 좋은 부분을 보며, 또 한 쪽 눈은 나쁜 부분을 보는 데 사용된다. 착한 것을 보는 쪽의 눈을 가려버리는 나쁜 버릇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나쁜 것을 보는 눈을 가려버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볼테르는 두 개의 눈을 가진 것은 세상이나 사물, 사람을 획일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양면성을 가지고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착한 것을 보는 좋은 눈을 가리고, 나쁜 것을 보는 악한 눈으로 살아간다고 탄식한다. 즉, 획일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갖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도 좋은 눈은 가리고 나쁜 것만 보는 눈으로 산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말이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어떤 눈을 가리고 사는지!’ 세상이 날로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도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세상이 살벌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좋은 것에 눈을 감고 나쁜 것만 보기 때문이다. 좋은 눈,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지 않고 나쁜 것만 보는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것이다.
아무튼 볼테르의 말처럼 선한 눈을 가진 사람 악한 눈을 가진 사람 따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선한 눈과 악한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단지 선한 눈이 악한 눈에 가려져 사는 사람, 악한 눈이 선한 눈에 가려져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실 인생이란 이것의 갈등연속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치충돌로 선택의 기로에서 자주 헤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안에 두 마음, 곧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두 눈 때문이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곧 선한 눈과 악한 눈, 혹은 나쁜 눈의 충돌이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것을 보는 눈을 가리고 좋은 것을 보는 선한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문제로 깊은 고민했던 사람이 바울이다. 그는 롬7장에서 이 문제로 깊은 씨름을 했다. 그는 선을 행하고 싶으나 잘 되지 않고, 악은 전혀 원치 않는데 그것에 끌려가는 마음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의 갈등, 그런데 문제는 악한 충동에 굴복하고 마는 자신을 보며 이렇게 외쳤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것은 단순히 바울만의 고민과 탄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민이고 탄식이다. 착한 쪽을 바라보는 눈이 가려져 원하는 좋은 것은 보지 않고, 원치 않는 악한 것 나쁜 것만 보니 말이다. 이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교육과 윤리, 철학, 종교다. 바울시대 유대교도 마찬가지다. 당시 유대교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율법에 대한 헌신적인 연구와 그 실제적인 적용이었다. 바울 역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살았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그를 더욱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런 절망적인 탄식이 앞에서 소개한 롬7:24절이다.
사실 이 문제는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율법으로, 종교적 수행이나 깨달음, 철학, 윤리체계나 교육제도로 해결할 수 없다. 바울이 고백한 대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성령이 답이다. 성령충만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소욕을 따를 때, 육체의 소욕을 벗어날 수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눈이 가려지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신령한 눈이 열리게 된다. 경건한 가치들을 지향하는 경건한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된다.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인색한 악한 눈이 가려지고, 이웃을 향하여 너그럽고 후한 선한 눈이 활짝 열리게 된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선한 눈, 착한 눈, 경건하고 신령한 눈,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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