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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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80회 작성일 21-08-09 08:44본문
열어주소서! ‘귀Ⅲ’
왕하5:1~14
2021. 8/8. 11:00
성공 뒤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
본문에 인생에서 큰 성취와 성공을 거뒀지만 그것을 삼킬 만큼 심각한 아픔을 가진 사람이 나온다. ‘나아만’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과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나병환자였다. 본문은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1). 이는 다 가졌지만 결정적인 결핍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의 이름의 뜻이 ‘즐거움’인데, 이름처럼 그는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때문에 결코 즐겁지 못한 인생이 되었다. 이것이 인생이고, 또한 인생의 비극이다. 다 갖춘 사람도 드물지만 부족한 그 한 가지가 인생 전체를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항상 ‘~이나’(그러나)가 문제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그러나) 나병환자더라.’(1b). 신약성경에도 비슷한 사람이 나온다. 바디메오는 아버지가 유지이나 그는 소경거지였고, 삭개오는 부자이나 동족에게 멸시를 받는 세리였다. 이전이 아무리 좋아도 ‘~이나’ 이후 때문에 망가지고 비참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나아만이 그랬다. 그래서 그는 성공 뒤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망가뜨린 ‘~이나’ 이후의 삶을 성공적으로 잘 극복한 공통점이 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게 되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삭개오가 뽕나무를 올라가게 된 것이고, 그토록 열심히 모았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오히려 은총의 도구로, 축복의 통로로 바꾸었다. 소위를 ‘상처를 별이 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나아만도 그랬다. 그에게 나병이 들지 않았다면 백기를 꽂고 선물을 잔뜩 싣고 적대국이었던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심각한 결핍이 있었기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적국의 선지자를 찾아갔고, 화를 참고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이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를 주님께 인도는 소중한 ‘손’인 것이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복
조명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게 드러나고, 산이 높을수록 계곡이 깊은 것처럼 장점이 많고 클수록 약점 또한 크고 강하게 드러난다. 나병이란 자체도 당시로선 불치병으로 심각한 것이었지만 나아만이 가진 그 좋은 장점들이 이를 더욱 심각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왕의 신임이 두텁고, 백성의 지지가 커갈수록 병에 대한 좌절과 절망도 더욱 커졌을 것이다. 본문은 이런 그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이여기다. 그가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게 된 것은 전혀 뜻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땅에서 붙잡아온 한 소녀의 말이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3). 소녀의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나아만은 왕을 찾아가 이 사실을 고하고, 치유를 위해 왕의 친서를 들고 이스라엘을 방문하게 되었다.
자신을 불행의 나락으로 끌어내린 원수에게 치유의 길을 소개한 붙잡혀온 소녀도 소녀지만 이런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인 나아만의 아내와 즉시 행동을 보인 나아만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그만큼 병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치유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적인 질병으로 인하여 마음이 겸손하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시할 수도 있는 포로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 바울의 고백처럼 어려움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얼마든지 복을 부르는 나팔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포로소녀를 통해 치유역사가 시작된 것을 보며 하나님의 역사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은 겸손하게 마음을 낮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도록 다가온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무엇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르니 항상 마음을 알고 귀를 열고 눈을 열어 마음으로 듣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복을 부른 ‘듣는’ 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나아만이 그 약점을 넘어설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듣는 귀’다. 특히 ‘겸손하게’ 듣는 귀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의 말을 겸손하게 듣는 복된 귀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무시할 수도 있는 소녀의 말에 이처럼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듣는 귀가 또 한 번 빛을 발휘하는 장면이 본문에 나온다. 그는 소녀의 말을 듣고 왕의 칙서를 들고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 이스라엘 왕에게 갔고, 이 일로 이스라엘 왕궁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4~7). 그것은 이스라엘 왕의 오해(7)와 무지 때문이다. 외국에 포로로 끌려간 어린 소녀도 엘리사의 존재와 능력을 알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왕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듣는 귀가 중요하다. 듣는 귀가 없어 왕이면서도 자기 나라에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다. 이것은 관심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일에 무관심했던 것이고, 그러니까 자기 나라에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귀는 관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관심이 있는 일이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뒤 늦게 엘리사의 존재를 알게 된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보냈고, 나아만은 엘리사의 무례와 성의 없는 처방(10)에 화를 내며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실망을 하거나 화를 내게 된다. 나아만처럼 지위가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이것은 자칫 국가 간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엘리사가 자신을 맞아 일정한 치료의 행위를 통하여 병을 고쳐줄 것으로 기대했다(11). 그런데 집까지 방문한 그를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다.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당장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엘리사의 태도에 이렇게 반응을 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이 치료를 받으러왔지 대접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치료는 환자가 기대하는 방법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엘리사로부터 환대를 기대했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치료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11). 그 기대에 어긋나자 화를 낸 것이다.
다행히 수행하고 있던 종들이 그가 엘리사를 찾아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상기시켜 줌으로 진정할 수 있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13). 그러자 그는 마치 말 잘 듣는 온순한 아이처럼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였다. 옷을 벗고 요단강으로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잠그니 나병이 깨끗이 치료되었다(14). 잘 듣는 것, 겸손하게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구약은 지혜를 ‘듣는 마음’(왕상3:9)이라고 했다. 겸손하게 잘 듣는데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듣는 것을 ‘믿음의 출발’(롬10:17)이라고 했다. 들음을 통해 지혜를 얻고, 들음을 통해 지혜 중에 지혜인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들음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셨다. 나아만처럼 겸손하게 듣는 귀가 복을 부른다. 누구의 말이든 겸손하게 듣고, 또한 들은 대로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나아만의 장점이고, 자신의 상처를 별이 되게 한 비결이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해야 하고, 주님의 방법대로 하시도록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겸손하게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성도의 모드(mode)
겸손은 성도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다. 겸손해야 주님이 귀히 여기시고, 귀하게 쓰시고, 또한 그를 통하여 복을 주신다.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공동체까지 복을 주신다. 겸손은 성도의 모드다. 성도는 겸손이라는 주님의 옷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겸손은 지난주일 고넬료를 통해 보았듯이 들음의 자세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비단 사람뿐만 아니다. 사막에는 물이 없지만 수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그것은 이슬 때문이다. 심한 일교차로 생긴 이슬이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된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나 곤충이 이슬을 먹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가 있다. 그것은 ‘낮은 자세’다. 뱀은 몸을 돌려 최대한 굽힌 후 자신의 몸에 내려앉은 이슬을 핥아먹고, 개구리는 고개를 숙여 떨어지는 이슬을 두 손으로 받아 마신다. 손이 없는 곤충들은 개구리와 같은 방법으로 최대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에 내린 이슬을 입으로 흐르게 하여 마신다. 낮은 자세가 사막생물에게 중요한 생존법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사막과 같다.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건강한 성도로서의 생존법 또한 낮은 자세, 곧 겸손이다. 무엇보다 겸손하게 듣는 귀, 그래서 들은 대로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이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치유하고 복이 되게 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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