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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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619회 작성일 21-06-07 14:48본문
열어주소서! ‘눈Ⅵ’
눅2:22~35
2021. 6/6. 11:00
주님과의 접촉면을 넓히려면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주님과의 ‘접촉면’을 확장하고 확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그렇게 흔들리고, 자주 넘어지고, 또한 쉽게 영적 탈진이 일어날까? 여러분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주님과의 접촉면이 좁거나 약하기 때문이다. ‘꼰지발’(우리지역 사투리)로 서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땅과 접촉면이 넓지 않기 때문에 얼마가지 못해 넘어지고 만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겨우 발가락 몇 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주님과의 접촉면이 좁은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작은 유혹이나 어려움에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고, 쉽게 낙심하고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이보다 나은 사람이 ‘한쪽 발’로 서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 역시 얼마 못가서 지치게 된다. 그 다음은 ‘두 발’로 서 있는 사람, 그 다음은 ‘앉아’ 있는 사람, 가장 안정되고 든든한 사람은 ‘누워’있는 사람이다. 물에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딱 달라붙는 것이다. 이렇게 접지(촉)면 넓고 클수록 안전하고 든든한 것처럼 신앙생활도 주님과의 접촉면이 넓고 클수록 안전하고 든든한 신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의 접촉(지)면을 확장하고 확대할 수 있을까? 사실 경건한 모든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쉬지 않고 기도하고, 틈나는 대로 찬양하고, 자나 깨나 말씀을 듣고 읽고 쓰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삶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주변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기회가 있는 대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주님의 몸인 교회와 그 몸의 지체를 사랑하며 헌신하는 것, 이런 모두가 주님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키우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여 ‘예배’라고 한다. 예배는 모든 경건생활의 마스터키(master-key)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속적인 예배생활이 주님과의 접촉면을 확장하고 확대하는 비결이라는 뜻이다. 안정되고 든든한 신앙생활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예배의 중요성
코로나 시대와 그 이후를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예배에 대한 성도의 인식변화다. 특히 열심히 잘 모이기로 유명한 우리한국 교회의 특징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여러 보고서를 통해 이런 점이 이미 드러나고 있고, 우리지역에서도 단순히 전면 온라인 예배가 온라인 교회로 전환한 교회가 생겼다. 비록 작은 교회지만 기성교회가 온라인 교회로 전환한 것은 주시할 만한 일이다. 어쨌든 이런 염려를 불식하고 지금까지 여러분은 현장예배와 디아스포라예배에 잘 참여해 주신 것 감사드린다. 오히려 디아스포라예배를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예배로 적극 활용하고 있어 무척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지체가 함께 모여서 드리는 현장예배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라고 다윗은 외쳤다. 형편상 디아스포라예배를 겸하고 있지만 예배에 있어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한 것은 ‘동거’이고, 동거는 일정한 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의 ‘현장성’을 강조한 것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일이요, 가장 긴급한 일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단순하지만 핵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배보다 중요한 일이 없고, 예배보다 긴급한 일이 없고, 예배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중요한 일 때문에 예배를 거르기도 하고 긴급한 일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경우를 말하곤 한다. 그런데 예배보다 중요한 일, 예배보다 긴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신앙의 성숙은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이를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 구약에서부터 공적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영혼에게 유익을 주는 수단이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다. 거기서 잠자던 영혼을 깨우고, 죽은 자와 다름없는 영혼을 살아나게 하고, 죄 사함과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장 잘 의식하게 되며, 그래서 자기의 죄악된 삶에 대하여 참회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것도 예배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가장 잘 주어진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사람(천국시민)이라는 신분을 가장 잘 깨닫게 된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주는 것이 예배이고, 천국에서도 쉬지 않는 것이 예배다. 이것이 예배의 중요성이고, 가치이고, 영광이다. 때문에 성도는 예배를 잠시도 멈춰서는 안 되고, 예배에 집중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예배의 중요성과 긴급성, 그리고 가치와 영광에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한다. 열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
본문에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소개 되고 있다. ‘시므온’이 그 주인공이다. 본문은 시므온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고(25), 둘째는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다(26).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는 모든 유대인이 염원하는 ‘메시야’를 뜻한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손꼽아 기다렸다. 시므온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미 오셨고, 또한 오신 것을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누구도 이 소식을 귀담아 들은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 문제가 있다. 하나는 그들의 기다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다리고는 있으나 막연한 열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전한 목자들의 문제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목자는 사기꾼 정도로 취급받는 거의 세리나 창기 수준의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주인으로부터 먼 곳에서 양을 치다보니 주인 몰래 양털이나 양의 젖을 팔아 돈을 챙기는 사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으로 취급한 것이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지도 못했다. 그들의 말은 신뢰할 수가 없으니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사회는 성전에서 멀어질수록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목자들은 직업상 양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성전을 가까이하고 안식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시편에서 성전 문지기를 사모한 것). 그러니 이런 사람의 말을 누가 귀담아 들었겠는가!
그런데 본문은 시므온의 기다리는 태도와 관련하여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경건하여’란 단어가 그것이다. 물론 우리 성경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원어는 다르다. ‘경건하여’란 단어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유라베스’(ευλαβης)인데, ➀율법, 곧 말씀을 성실하게 행하여 영성이 깊은, ➁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시므온이 어떤 자세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말씀을 사랑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특히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그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였고, 성령의 지시와 깨닫게 하심으로 결례차 성전을 방문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던 메시야로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되었고,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29~32), 또한 마리아에게 의미심장한 예언을 남겼다.
예배의 영광과 복
누가복음이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성령의 역할’이다. 성령이 함께 하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이 깨닫게 해주셔서 메시야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누가의 신학이다. 이런 누가의 신학이 잘 드러나고 있는 곳이 본문인데,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역사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시므온처럼 말씀을 성실하게 행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통해 성령의 함께 하심과 성령의 지시하심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 만으로도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 영광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윗을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예배자로 뽑고 있는데, 다윗 역시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예배하러)올라가자는 말만 들어도 기뻐했던 사람이다(시122:1). 그는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피난살이를 할 때도 그가 안타까워했던 것은 무리와 함께 예배했던 일을 기억하며, 예배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시133:1). 이는 우리의 예배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주님도 우리가 교회에서 현장예배로, 각 가정에서 디아스포라예배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외치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선한가!’(םה טוב), ‘얼마나 아름다운가!’(םה נים). 그러면서 예배의 영광을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사장 아론의 임직식에 비유했고, 예배의 복을 가나안 땅 전 지역에 생명을 공급하는 헐몬의 이슬에 비유했다. 얼마나 예배가 영광스러운 일인지, 얼마나 우리에게 복을 부르는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 예배의 영광이고, 예배의 복이다. 그렇다. 주님께 감동을 드린 인생이, 영광을 받고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배야말로 우리가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비결이다.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예배자가 되려면 예배의 중요성과 가치, 영광과 복에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배에 눈이 열려 주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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