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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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514회 작성일 21-06-28 07:24본문
열어주소서! ‘눈Ⅸ’
창45:1~8
2021. 6/27. 11:00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조(趙)나라에 공손룡(公孫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누구나 식객(食客, 세력 있는 집에 얹혀사는 사람)으로 붙들어두었다. 하루는 고함을 잘 지른다는 사람이 찾아와 머물기를 청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물론 그것도 특기냐며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1년이 넘도록 하는 일없이 놀고먹었지만 공손룡은 싫은 기색하나 없었다. 어느 날, 공손룡이 연(燕)나라에 다녀오다가 큰 강을 만나 길이 막혔다. 그날 안으로 꼭 건너야했기에 멀리 강 건너 뱃사공을 불렀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사공이 듣지 못했다. 드디어 때를 만난 그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언덕 위에 올라 천둥 같은 고함(高喊)을 질러댔다. 그러자 소리를 들은 뱃사공이 배를 저어와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 고사에 잘 어울리는 한자어가 명심보감에 나온다. ‘天不生無祿之人(천불생무록지인)이요, 地不長無名之草(지부장무명지초)니라.’ 하늘은 녹(祿)없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을 포함 모든 것은 제 역할과 몫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누구나 존재의 이유가 있고, 존재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고,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게 되는데, 자신의 사명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이유가 되는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팔려온 것이 아니다!
이를 일찍이 깨달았던 사람이 본문에 나온다. ‘요셉’이다. 그는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그녀가 낳은 아들 요셉도 특별히 사랑했다. 이것이 자식들 간의 불화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그의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의 꿈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그 꿈을 찢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꿈을 지켜주고, 키워주고, 이루도록 도와주어야 할 형제들이 미움 때문에 그것을 짓밟고 이루지 못하도록 찢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그를 죽도록 물이 없는 웅덩이에 가뒀으나 죽게 하는 것보다 돈을 받고 파는 것을 났게 여겨 은20을 받고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렸다. 미디안 상인은 그를 이집트 사람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되팔았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10여 년 동안 노예살이를 했다. 또 다시 그는 보디발 아내에게 성(性)추행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2년 동안이나 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팔려온 노예, 주인 아내를 추행했다는 파렴치한 죄수에서 대제국의 총리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를 포함한 주변 세계에 전무한 흉년이 들었고, 이집트는 그의 지혜로운 정책과 철저한 준비로 곡식이 넘쳤다. 이 소문이 주변에 두루 퍼져 식량을 구하려고 각 나라 사람들이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야곱과 그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도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를 찾았는데, 그들은 자기들 앞에 나타난 이집트의 총리가 그들이 미워서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았던 요셉이란 사실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본문은 이런 그들을 요셉이 위로하며 한 말이다. 그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b,5).
비슷한 말이 7,8절에도 이어지고 있다. 형들이 자신을 팔았지만 자신은 팔려온 것이 아니라 많은 생명을 구하려고 하나님께 보내셨다는 고백이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온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며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로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자신의 사명에 눈이 열린 사람
‘자신은 형들에 의해 팔려온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기(氣)가 막히는 일인데,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라고 말한다. 동일한 사건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해석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형제가 작당하여 형제를 노예로 팔아먹은 악질 인신매매 사건을 모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또한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고백은 하나님의 섭리에 눈이 열린 사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눈이 열린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목적에 따라 만드셨고, 심지어 악인까지도 목적에 적합하도록 섭리하신다는 뜻이다. 요셉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었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여기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고백한 것이다(물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요셉이 형제들의 죄를 간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분명히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죄를 묻는 것은 자기 영역도 아니거니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니 용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이,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어떤 상황과 환경에 그저 돌멩이나 휴지조각처럼 혹 던져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의미나 목적도 없이 그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고 말씀한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에는 특별한 ‘사명’(목적)이 전제되어 있다. 각자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어 이 세상에, 이 세대에,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와 일터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가 우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실을 깨닫고 사느냐에 있다. 그러니 한 인간이 태어나 사명을 자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소위 이 땅에서 고귀한 일을 이룬 사람은 한결같이 사명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사명을 깨달은 날을 생애 최고의 날로 여겼다. 칼 힐티는 ‘인간 생애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고 했다. 그렇다. 루소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고 했다. 한번은 존재를 위해 태어난 것, 곧 생물학적인 탄생이고, 다른 한번은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 곧 사명의 자각이다. 사명의 자각이 새로운 탄생인 것이다. 그러니 사명에 대한 자격이 없이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았고, 지금까지 여기까지 이 자리에까지 왔다. 이렇게 섭리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눈이 열려야 한다.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주님의 뜻, 곧 우리의 사명에 눈이 열려야 한다. 그래야 성공을 넘어 가치 있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
집안에만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두문불출’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섰을 때, 고려의 선비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관직을 버리고 집을 떠나 두문동(杜門洞,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있는 광덕산) 골짜기로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간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생긴 말이 두문불출이다.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다는 뜻이다. 역사는 그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른다. 원래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73명이었는데, 한 사람이 그곳을 나온 바람에 72명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온 한 사람이 세종시대의 명 제상 ‘황희’다.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이끌고 갈 인재를 뽑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르지만 선비들이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두문동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화가 났다. 나와서 시험을 보라고 달래도 보고 협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만약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두문동 전체를 불질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 때 두문동에 모인 선비들이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서 후세 사람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전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황희였다. 그렇게 두문동 학살이 일어나던 날 밤, 황희만 홀로 눈물을 흘리며 그곳에서 나왔고, 나머지 72명은 모두 불에 타죽고 말았다. 조선왕조초기에 일어나 아주 끔찍한 사건이다. 이후 황희는 동료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온전히 백성만 위해 살았다. 세종대왕의 놀라운 업적 뒤에는 황희의 삶과 섬김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황희처럼 사망의 불구덩이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해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기억의 확장이고 확대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기억의 확장과 확대가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기회있는 대로 이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눈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성공을 넘어 가치 있는 삶,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스러운 삶,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재물과 같은 삶을 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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