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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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592회 작성일 21-05-17 16:10본문
열어주소서! ‘눈Ⅲ’
막10:42~45
2021. 5/16. 11:00
주변 사람이 형제로 보일 때
어느 스승이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둠이 지나가고 새 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러자 한 제자가 대답했다. ‘주변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새 날이 온 것을 알 수 있지요.’ 스승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창문을 열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가 보이기 시작하면 날이 밝아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다른 제자가 말했다. 스승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여러 제자가 각자 의견을 나름대로 말했지만 스승은 계속 아니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면 스승님은 어둠이 가고 날이 밝아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 날이 밝아온 것이다.’
새 날은 아침이 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형제(자매)로 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눈이 열려서 모든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고, 형제로 보여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에 비로소 새 날이 밝아온다는 뜻이다.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한 새 마음이 되어 남을 형제처럼 섬길 줄 알고, 남의 고통과 아픔을 형제의 고통과 아픔처럼 느낄 만큼 공감할 때, 새 날은 비로소 밝아온다. 다시 말해 섬김의 가치에 눈이 열려서, 주변 사람을 섬김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 새 날이 열린다는 뜻이다. 이 시간 주싱 말씀을 통해 섬김의 가치에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 앞에 새날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섬김의 중요성
복음서는 우리 주님의 사역을 크게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선포(케리그마), 가르침(디다케), 교제(코이노니아), 섬김(디아코니아)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교회와 성도의 사역이 되었다. 성김도 그 중에 하나로, 그래서 섬기는 것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우리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특히 사도 야고보는 섬김을 경건(믿음)의 척도라고 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27).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사랑의 섬김이 참된 믿음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어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17)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행함’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다운 삶을 의미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뜻은 섬김이다. 2장은 1:27절 말씀을 성경적인 근거로 설명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섬김을 뜻하는 영어단어 ‘service’에는 예배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한다. 예배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섬기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섬기는 것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본문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은 섬김의 중요성, 혹은 섬김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섬김의 종으로 오셨다.
지금 주님은 착잡한 심정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반면 제자들은 다소 들떠 있었다. 함께 생활해도 이렇게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들은 이제 곧 출세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요한과 야보고 형제가 선수를 쳤다.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신들에게 주님의 좌우자리를 달라고 했다. 이 일로 제자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바로 이 사건을 바로 잡기 위해 주신 말씀이 본문이다. 주님은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으뜸이 되려면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 자신 역시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를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 잡히시기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의 발을 씻어주신 사건이다. 주와 선생으로서 신체의 가장 더러운 곳을 친히 씻어주셨다. 이는 섬김의 중요성을 제자들에게 부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에게 섬김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섬김은 주님께서 모범을 보이신 삶이고, 제자인 우리는 그 삶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섬김은 주님의 요구이다.
물론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섬김이 곧 제자의 길이란 것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는 있다. 섬김이 주님의 삶이라면 앞에서 말한 대로 이는 또한 제자의 삶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섬김을 통해 주님의 제자인 것이 드러나게 된다. 즉, 세상이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 주님의 삶이 섬기는 삶이었고, 우리의 섬김이 주님의 삶을 드러내기에 세상이 섬기는 우리를 보고 그 선생의 그 제자로 알아보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섬김을 보이지 않는 주님 자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한다(마25:40,45). 그렇다. 섬김은 주님을 보여주고, 섬김은 주님을 만나게 하고, 섬김은 주님 자신을 섬기는 일이다. 그래서 섬김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으로, 거룩한 의무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말 ‘구제’란 뜻의 히브리어 단어는 ‘체데카’이다. 이는 ‘의’, ‘정의’, ‘공의’란 뜻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구제도 ‘체데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할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섬기는 것이 공의(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모든 가정에는 ‘푸슈케’라는 동전함이 있고, 여기에 구제금을 모아서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그들은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의무인 십일조와 함께 구제를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을 십일조처럼 신성한 의무로 생각했다. 우리 기독교 역시 주님의 말씀에 이런 전통이 더해져 섬김을 경건의 척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거룩한 의무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린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 섬김을 통해서 구원의 감격을 경험할 수 있다.
섬김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오래 전, 창22장을 묵상하다 큰 도전을 받은 적이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었고, 이삭은 제물을 태울 땔감을 지고 있었다. 그때 이삭이 말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제물로 드릴 양은 이삭 자신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이렇게 물은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아브라함의 입에서 예언이 나왔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호와 이레!’ 이 대화에서 이삭의 질문이 마치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질문으로 다가왔다. 제물과 같은 성도, 제물과 같은 교회를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우리 교회를 개척한 배경이 바로 이 말씀이었고, 늘 드리는 기도제목이 되었다. ‘땔감과 같은 성도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제물과 같은 성도가 되게 하소서. 제물과 같은 목사가 되게 하소서. 주님이 찾으시는 제물과 같은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런데 본문에서 그 답을 발견했다. 제물과 같은 성도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회가 되는 비결이 ‘섬김’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45b)고 하셨다. 여기서 섬기는 것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제물)이 되는 것이란 뜻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섬김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섬김이 곧 희생이다. 물질로 섬기면 물질의 희생이 있어야 하고, 시간으로 섬기면 시간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몸으로 섬기면 몽의 희생이 있어야 하고, 재능으로 섬기면 재능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섬기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십자가 신학’의 핵심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섬김의 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섬김의 모델이시며, 근거시다. 섬김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다.
화가와 성도
빈센트 반 고호의 이야기로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어느 날, 고호에게 단단히 화가 난 화가 마우베가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한 사람은 화가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고호가 정색하고 말했다. ‘그림을 판다는 것이 화가임을 뜻하는 것인가요? 저는 화가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으면서도 끝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내가 화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고,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일 따름입니다.’ 나는 여기서 ‘화가’를 ‘성도’로 바꾸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도는 힘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는 사람이다. 특히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천국의 가치를 비롯하여 말씀의 가치, 예배의 가치, 한 영혼의 가치, 영생의 가치와 같은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이런 것들에 눈이 열리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 성도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셨고, 또한 주님께서 요구하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제물과 같은 섬김의 가치에 눈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애쓰고,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토록 소중한 섬김의 가치에 우리 모두의 눈이 활짝 열리는 복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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