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612회 작성일 21-05-31 10:10본문
열어주소서! ‘눈Ⅴ’
눅15:1~7
2021. 5/30. 11:00
한 사람의 가치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예전에 영국에서 발행된〈경이의 세계〉라는 잡지에서 한 사람의 몸값을 1달러 남짓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커피 몇 잔용 당분, 못 1개를 만들 수 있는 철분, 약간의 성냥을 만들 수 있는 인, 몇 개의 비누를 만들 수 있는 지방, 닭장 1개를 칠할 수 있는 양의 석회, 이를 값으로 계산해보니 약 1달러 정도라는 것이다. 나치시절 유대인 학살책임자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기에 600만이란 소중한 생명을 학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 발간된〈와이어드〉라는 잡지에서는 사람의 몸을 수액, 조직, 항체까지 분리해서 돈으로 바꾸면 4,500만 달러(한화로 약 540억 원) 이상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유전정보가 담긴 DNA는 g당 130만 달러로 총 970만 달러, 골수조직은 g당 2만 3,000달러로 총 2,300만 달러, 체내 항체를 시가로 따지면 730만 달러 가치가 있고, 주요기관의 가격은 폐 11만 6,400달러, 신장 9만 1,400달러, 심장 5만 7,000달러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의 몸값을 나름대로 1달러에서 4,500만 달러까지 메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한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성경은 한 사람의 가치를 값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 한 영혼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영혼을 사랑하신 예수님
이와 같은 말씀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 막5장에 나온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을 가시게 되었는데, 그곳에 군대귀신에 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지를 못하고 짐승처럼 사슬에 묶여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제어해 보려고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얼마나 힘이 센지 그것을 끊어버렸다. 누구도 이 사람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주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귀신같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 같다. 그가 귀신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님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자 귀신이 마침 근처에 있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주님이 허락하셨고,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무려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몰사했다. 그 많은 귀신이 그 사람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리고 귀신들렸던 사람은 금세 정상이 되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해만 끼쳐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 죽은 사람처럼 무덤 사이에 버림받은 사람, 주님은 이런 그를 고쳐주시기 위해 돼지 2천 마리를 희생하셨다. 실용성을 따지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주님께서 하신 일에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이런 대가를 지불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가? 더군다나 그 돼지들은 주님의 소유도 아닌데, 이런 사람 하나 구하자고 돼지 주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이 일로 주님이 곤경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돼지 주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주님께서 고스란히 물어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경제적 손실과 책임문제를 고려하시지도 않고 그를 고쳐주셨다. 사람을 살리는 데는 그 어떤 것도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되다는 것, 사람의 가치는 모든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절대가치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가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가치관에 따르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 건장한 노예 한 사람의 공시가격이 은30이었다. 가룟유다가 주님을 은30에 팔아넘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고향 사람들, 심지어는 부모형제와 친척에게까지 버림 받은 이 사람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다.
잃은 영혼을 찾으러 오신 주님
본문 역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삶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 이야기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녔다. 그리고 양을 찾자 ‘즐거워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는 ‘친구와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며’ 함께 즐겼다. 여러 가지로 그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보이고 있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다 둔 것, 즐거워하며 어깨에 메고 온 것, 그리고 양 한 마리 값을 능가하는 잔치를 베풀어 즐긴 것이다. 그런데 이 이상한 목자가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종처럼 평생을 사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나 혼자만 존재해도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오셔서 죽으셨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은 ‘그렇다’이다. 엄밀히 말하면 주님은 나 하나를 위해 오셨고, 나 하나를 위해 종처럼 사셨고, 나 하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목숨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차별을 넘어
요즘 인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미국에서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인종차별적인 증오범죄,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우리 한인의 피해도 많다. 본문은 이와 같은 차별하는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도전의 말씀이다. 사실 우리가 본문을 영혼구원이란 전제로 접근하다보니 이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본문 1,2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이 나온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이런 인위적인 틀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누구도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삶으로 이에 맞서면서 도전하신 분이 주님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을 차별하시지 않고, 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식탁교제를 가지셨다(2). 차별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에겐 이러한 주님의 모습이 충격이었다. 본문은 그들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말씀이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소중한 존재이고,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물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겠다고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둔 것은 주님께서 역(逆)차별하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은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소중하지만 아픈 손가락을 유독 조심하면서 소중하게 다루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우선순위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이신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세리나 죄인들을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덮어씌워서 차별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를 친히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신분이나 지위나 직업이나 그 무엇으로도 차별할 수 없는 존재다. 존재 자체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치의 회복을 위하여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회와 성도가 밉상이 되었지만 우리 기독교 복음은 참으로 위대하다. 생명의 가치를 실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우리사회에서 오랫동안 나병환자는 끔찍한 차별을 받아왔다. 나병을 천형이라 했고, 천벌을 받았다고 하여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차별하다 못해 학대까지 했다. 이런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핀 기관이 교회였고, 그 사람들이 성도였다. 우리 지역에도 그 살아있는 증표가 있는데, 신풍 애양원이다. 마치 앞에서 말한 군대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마을 사람은 물론 부모형제에게까지 버림받아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그들을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며 사랑으로 보살펴주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도록 해주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 역시 복음 안에서 구원이 필요한 소중한 존재로,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복음전도를 ‘존재가치의 회복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복음화야말로 진정한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복음 자체이신 주님의 삶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주님의 아주 특별한 소유(보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용서하며 품어주고, 사랑하며 섬기는 것,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방에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혼의 가치에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에 대한 가치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하며 품어주고, 사랑하며 섬기는 일이 가능해진다. 전도도 그렇다. 사탕을 봉지에 담아 전도지와 함께 전도하라고 주면 사실 굉장히 부담스럽다. 그저 간당간당 겨우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전도까지 하라니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부담스러운 일을 지난주부터 교회에서 시작했다. 그렇지만 영혼에 대한 가치에 눈이 열리면 달라진다. 잃은 양 한 마리에게 쏟으신 주님의 사랑과 정성이 이해가 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이 말씀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면 그 부담스러운 전도를 마땅히 해야 할 사명으로 생각하게 되고, 말하지 않아도 가방이나 호주머니에 전도지를 넣고 다니며 전도하게 된다. 아무튼 전도를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고, 가장 의미 있고, 가장 가치가 있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기게 된다. 불이익을 당해도 참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도 용서하며 품어주고, 누구라도 사랑하며 섬기게 된다. 영혼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열리도록 기도하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