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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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619회 작성일 19-04-21 16:39본문
부활의 축복
벧전1:3~5
2019. 4/21. 11:00(부활주일)
불행을 고치는 약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인류의 최대 최후 원수인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주일이다. 무덤과 같은 절망적인 세상,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통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생명과 환희와 소망을 주신 주님께 먼저 영광과 찬양을 드리자!(주님께 영광의 박수, 감사의 박수). 아무튼 부활의 기쁨과 영광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이 시간에는 부활의 축복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생은 깊은 바다 속을 다니는 잠수함과 같다. 아무리 최신의 잠수함이라도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잠수 활동을 할 수 없다. 소망은 산소와 같은 것이다. 인생이란 잠수함에 소망이라는 산소가 있어야 사람이 살 수가 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으면 삶의 이유도 사라진다. 인간은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이기 때문이다. 자살을 택한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소망이 있으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극복한다. 칠레광부 33명이 지하 700미터의 갱도에서 69일 만에 구출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2010년).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갱도에서 실낱같은 소망 하나로 버텨 구출이 되었다. 사람은 소망을 먹고 산다. 셰익스피어는 불행을 고치는 약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이라고 했다. 심리학에서의 ‘위약(僞藥)효과’도 같은 원리다. 인생이 불행하고 외롭고 슬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처방할 수 있는 약은 바로 소망이다.
소(희)망이 도리어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데 요즈음 환경오염으로 공기의 질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특히 미세먼지는 우리나라를 맴도는 기후재난의 ‘신흥강자’가 되었다. 단순한 걱정거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공기의 질을 떨어뜨려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먼지처럼 소망도 ‘헛된’ 것이 있고, ‘가짜’가 있다. 이런 소망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물론 헛된 소망도 소망이니까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기대어 사는 것은 잠재적 불행의 씨앗을 가지고 위태롭게 사는 것이다. 몇 년 전, 이코노믹 저널(the Economic Journal)에 희망이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재미있는 연구가 실렸다. 연구대상은 독일에서 오랜 기간 실직상태로 있다가 은퇴한 사람들이었다. 연구진은 실직상태로 은퇴를 맞이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크게 올라간 것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은퇴 후에 받게 되는 복지혜택 때문도 아니고, 더 이상 실직자로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직상태에 있을 때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언젠가 직장을 갖게 되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은퇴로 그 희망이 사라지자 회복되기 시작했다. 은퇴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통해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삶의 만족도가 크게 오른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희(소)망의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 소망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우리를 살리는 참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참 소망의 근원과 특징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주후 64년경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가 기독교에 대하여 박해를 시작할 무렵 베드로가 고난에 처한 교회와 성도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다. 비록 핍박과 박해로 고난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죽음을 이기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먼저 참 소망의 근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3).
참 소망의 근원이 주님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한 절망은 없다. 죽음을 인류 최대 최후의 원수라고 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죽음이라는 절망을 뚫고 부활하셨다. 그러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참 소망이고, 또한 참 소망을 주신 분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준 축복인 참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산 소망이 참 소망인 이유를 이어서 말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4).
산 소망이 참 소망인 이유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를 보면 ‘기업’을 수식하는 부정적인 뜻을 가진 세 형용사에 부정접두어(α)를 붙여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참 소망의 특징이기도하다. 여기서 ‘썩지 않고’는 어떤 공격에도 파괴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더럽지 않고’는 흠이 없고 순결하다는 뜻이고, ‘쇠하지 않고’는 영원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참 소망은 어떤 공격에도 파괴되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 흠이 없고 순결한 것, 시들지 않는 영원한 것을 기업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를 ‘산’ 소망, 곧 ‘살아있는’(alive, 현재분사) 소망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산 소망은 단순히 소망이 살아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소망이 살아서 활동하게 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소망 또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 살아서 활동하는 소망을 주셨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바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아있는 소망이 그들 속에 살아서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상도, 악한 권력자도, 세력도 더 이상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 위협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넉넉히 이기고도 남았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살아있고 살아서 활동하는 참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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