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이 약속된 말씀,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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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790회 작성일 19-03-31 13:19본문
축복이 약속된 말씀, ‘절제’
창3:1~6
2019. 3/31. 11:00
최초의 행복원칙
돼지들이 모여 하나님께 인간을 고소했다. 인간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을 두고 ‘돼지처럼 먹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돼지들 입장에서 억울하다는 것이다. 돼지는 위(胃)의 7~80%가 차면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더 먹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돼지처럼 먹는다.’는 말을 ‘미련한 인간처럼 먹는다.’로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돼지들의 손을 들어주셨다. 그러고 보니 돼지가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났다거나 너무 많이 먹어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소를 본 적이 없고, 과로로 쓰러지는 개미를 본 적도 없다. 과속으로 넘어지거나 사고를 냈다는 동물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먹는 것이든, 일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절제하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절제는 안전장치와도 같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도 제동장치가 없으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심각한 사고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한속도 내에서 고속도로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것은 제동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승강기를 편하게 이용하는 것도 안전장치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의 특징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다. 건강하고 성숙한 인생도 마찬가지다. 과욕을 조절하여 인생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다. 그래서 창조당시 하나님은 인간에게 문화명령(창1:28)에 이어 절제명령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셨다. 에덴동산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었다. 그런데 그 에덴의 복을 누리는 한 가지 조건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이다. ‘여기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으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6,17). 이 절제명령은 성경에 나온 최초의 행복원칙이다. 절제는 에덴의 행복을 누리고 지키는 비결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셔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셨지만 절제를 통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절제명령에 실패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제의 실패가 비극의 시작이었다.
잃어버린 에덴
본문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흔히 하와가 사단의 화신(化身) 뱀의 유혹에 무너진 이유를 살과 뼈처럼 항상 함께 있어야 할 아담과 떨어져 있었던 것,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지 못하여 사단에게 틈을 주었던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당히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과 함께 있지 않을 때 유혹에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삶의 표준이고 사단을 제압하는 강력한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하지 못할 때 사단의 표적이 된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강한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대고 말았다.
히브리어로 죄를 ‘하타’(חָטָא)라고 한다. ‘(목표에서)벗어나다.’, ‘(목표를)놓치다.’는 뜻이다. 정해놓은 한계(목표)를 벗어나거나 놓친 것이 죄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통제력의 상실인데, 절제하지 못한 것은 죄의 결과다. 그래서 이렇게 절제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에덴의 행복을 누리지도 지키지도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비극은 고스란히 그의 자손인 인류에게 전가(傳家)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은 끓어오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인 극악(極惡)한 자가 되었다. 아담의 10대 후손 노아는 홍수이후 술에 취하여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 외에도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절제하지 못하여 그 탁월성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도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르우벤이 대표적인 인물, 창35:22, 49:3,4 참조).
절제의 중요성
절제를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ἐγκράτεια)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를 알맞게 잘 조절한다.’는 뜻이다. 또한 ‘경비하다.’ ‘파수하다.’ ‘지키다.’의 뜻도 있다. 절제는 나를 지키는 것이다. 한계를 벗어나게 만드는 죄로부터 나를 지키고,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이 절제다. 여러 위험으로부터, 방탕이나 방종, 탐욕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에덴의 복을 비롯한 모든 신령한 것을 지켜주는 ‘영적 지킴이’가 절제다. 갈라디아서에 나온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5:22~24)를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진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제일 마지막이 절제다. 절제가 맨 나중에 나온 것은 다른 열매에 비해 비중이 작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다른 열매는 성경에 자주 나오고 있으나 절제는 복음서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구약에도 드물게 나온다. 그렇다고 절제가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파수하고 지킨다는 절제의 뜻처럼 절제가 마지막에 나온 것은 다른 열매를 지켜서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절제를 ‘다른 열매를 담는 바구니’라고 했다,
생각해 보라! 절제가 없는 사랑은 아이를 망치고, 절제가 없는 기쁨은 너무 가볍다. 절제 없는 화평은 태만이 되고, 절제 없는 인내는 무감각한 인생이 되게 한다. 절제 없는 자비나 양선은 의존적 거지근성을 만들고, 절제 없는 충성은 탈진에 이르게 한다. 절제 없는 온유는 유약한 인간을 만든다. 그러니 절제는 성령의 열매를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가치를 완성시켜주는 성품이다. 절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잘 지키는 지혜다. 복을 더욱 복되게 하는 것이 절제다. 그래서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솟아난다.’고 했다. 게다가 성도다운 삶을 실천하도록 해준다. 바울은 성도의 자유원리를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성도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다. 하지만 남의 유익을 위하여, 덕을 세우기 위하여 스스로 그 자유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제논의 제자).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랬다. 주님처럼 바울처럼 남의 유익을 위해,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권리도 자유도 절제하며 사는 사람에게 복은 당연하다.
유혹과잉시대
‘욕구(만족)지연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더 큰 만족, 또는 더 큰 유익을 얻으려면 당장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절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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