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이 약속된 말씀,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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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839회 작성일 19-04-07 13:09본문
축복이 약속된 말씀, ‘포기’
빌2:5~11
2019. 4/7. 11:00
포기의 미학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한 우물을 파라!’는 옛말도 이와 유사한 뜻을 지니고 있다. 내가 잘 하거나 잘 할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여 거기에만 집중한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을 보면, 한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회사도 주력사업에 집중할 때 성공한다. 그렇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실패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팔방미인은 박복하고 끼니 걱정을 한다.’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는 길을 명확하게 했으면 그 목표에 맞는 일에 집중해야만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자꾸 다른 곳에 한눈을 팔다보니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토끼와 오리).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선택과 집중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포기다.
사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선택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에서부터 누군가를 만나고 일하는 것, 먹고 마시는 것, 휴식하고 잠자는 것, 심지어는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화장을 하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챙겨서 신는 것까지 이런 자잘한 일들도 모두 선택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에는 포기가 전제되어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선택은 의미가 없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를 선택하고 예배를 선택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약속을, 나들이를, 계획한 일을, 혹은 만남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선택하여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포기의 미학’이다.
포기미학의 본보기
본문은 ‘그리스도 찬가’라고 이름이 붙여진 초대교회 찬양이다. 이 아름다운 찬양으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고, 어떠한 일을 하셨고, 지금 어떤 위치에 계시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주님의 삶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본문이다(교리적으로 기독론의 핵심을 잘 보여줌). 이 말씀은 주님의 ‘낮아지심’(탄생-비참한 생애-죽으심)과 ‘높아지심’(부활-승천-하늘 보좌에 앉으심)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이 낮아지심의 핵심이 ‘포기’다. 여기서 주님의 포기가 두 종류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자기부정(비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 이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설명해준다. 주님은 하나님과 똑 같은 능력과 영광과 특권과 권세를 가지신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이런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도 권세도 능력도 특권도 권리도 자유도 없는 종(노예/ 당시 노예를 상상하기 바람)과 같은 존재가 되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7). 모든 것을 다 가지신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스스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비천한 종이 되셨다. 이것이 주님의 자기부정이고 또한 자기비움의 사건이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포기다.
다음은 죽으심이다. 사극에서 종종 다뤄지는 내용으로, 역모에 휘말려서 세도가의 가문이 풍비박산 되어버린 이야기를 종종 보았을 것이다. 남자는 대부분 처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고, 여자는 노비로 강등(降等)이 되어 흩어지게 된다.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노비로 신분이 강등된 것보다 노비로 평생 사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대갓집 마님에서 하루아침에 노비가 된 것도 비참한 일이지만 전에 자신보다 못했던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면서 다른 노비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일하고 같이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주님도 그러셨다. 단지 종이 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갖 멸시와 천대, 수모를 당하면서 종처럼 복종의 삶을 사셨고, 나중에는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십자가’는 노예에게만 처해지는 처참한 형벌이다. 주님께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비참한 종이 되셔서 끝까지 종으로 사시다 종으로 죽으셨다. 이와 같이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시고, 또한 종처럼 복종의 삶을 사시다 십자가라는 극형으로 죽으심 역시 주님의 포기다. 그러므로 포기라 단순히 몇 가지 권리나 특권을 내려놓는 것, 약간의 손해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포기의 삶이 어렵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좁을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채워주신 하나님
흔히 우리 기독교 영성을 ‘비움과 채움’의 균형이라고 말한다. 본문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신 삶을 통해서 이와 같은 비움과 채움의 영성을 잘 보여준다. 주님의 삶은 포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랬다면 주님은 영구적인 실패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포기의 삶을 사시자 하나님께서 주님을 지극히 높여주셨다. 부정하고 비운 그곳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존재)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11). 우리는 비워진 곳이 채워지는 것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은 곧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께서는 비워진 곳을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더 좋은 것으로, 더 귀한 것으로, 더 영광스러운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주님의 삶을 통하여 확증해주셨다. 그러니 주님은 포기미학의 본보기시면서 채움미학의 본보기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 붙잡고 있는 것들, 의지하는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비우면 채워주신다고, 놓으면 붙잡아주신다고, 뛰어내리면 받아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결정적인 이유는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밤길을 걷다가 발을 잘못 디뎌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굴러 떨어지면서 나무뿌리를 움켜잡았다. 어둠 속에서 나무뿌리를 붙잡고 낭떠러지에 매달린 그는 도움을 호소했지만 외진 곳이라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환청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라!’ 지금 이것 때문에 그나마 목숨이 붙어있는데, 이것을 놓으라니 기가 막혔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를 했다. ‘내가 이것 때문에 목숨이 붙어있는데, 이것을 놓으라니요? 도대체 하나님은 내 사정을 알고나 하신 말씀이에요?’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놓아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크게 상한 이 사람은 사력을 다해 나무뿌리를 붙잡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새벽이 되고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절벽에 매달린 이 사람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발밑을 처다 보고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붙잡고 있는 것을 왜 놓으라고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 높이는 겨우 1미터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로 발밑에다 안전지대를 두고 사투를 벌이며 공포의 밤을 보낸 것이다. 이 사람이 우리의 모습이다. 살면서 왜 염려하고 왜 고민하고 왜 갈등하고 왜 두려워하고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아는가? 우리의 신앙에 왜 성장과 성숙이 없는지,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와 복이 왜 채워지지 않는지 아는가?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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