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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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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420회 작성일 17-05-2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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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기쁨

빌3:1~9

2017. 5/21. 11:00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차이(?)

어려서 아버지가 늘 한 말이다.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은 생활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잘사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버리지를 않는 습관이 있어서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저 막대기 하나도 훌렁훌렁 내버리지 않고 잘 챙겨두면 언젠가는 요긴하게 쓸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당을 쓸 때 비질도 밖으로 하지 못하게 하고, 마당 가운데로 쓸어 모으도록 했다. 밖에서 놀다가 올 때도 빈손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하다못해 남의 집 울타리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라도 뽑아들고 들어와야 했고, 길을 가다가 대소변이 나오려하면 꾹 참고 집에 와서 보도록 했다. 정 참기 어려우면 가까운 우리 논밭에서 보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부모가 다 그랬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함께 놀던 친구가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십중팔구 집에 잠깐 일보러 간 것이었다. 반면에 못사는 사람은 손에 들어온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쉽게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에겐 오던 복도 나간다고 했다. 그럴듯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너무 풍요로워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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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한편에선 참 감사하고 감동이 된다.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었던 생활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으니까! 아버지의 이런 정신이 없었다면 그 산골에서 어려운 살림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공부시키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마다 아버지를 바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시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나를 공부시켜 주었다. 그런데 풍요로움이 병(affluenza)이 될 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살다보니 무조건 움켜쥐고, 모으는 것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취할 건 취해야 하지만, 또한 버릴 건 버려야 한다. 움켜쥐는 것도 중요하지만 버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 사실 오늘날은 제대로 버리지 못해 탈이 나고 병이 되는 것이 더 많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시간은 바울의 삶을 통해 ‘버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나는 모두 버렸다!

오늘 말씀은 버리는 문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7~9a). 요약하면 ‘나는 모두 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버린 것들은 누구나 하찮게 여기는 쓸모없는 것들이 아니다. ‘내게 유익하던 것’이라고 한 것처럼, 당시 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었다. 얻기 위해 생명을 거는 귀중한 것들이었다. 그러면 바울이 버렸던 것들은 무엇인가? 5,6절의 말씀이 그것들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은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다(삼상17:26). 성경 역시 이를 강조하고 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선민의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소중한 할례를 ‘8일 만에 받았다.’고 했다. 이는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정통 유대인 남자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례를 버렸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라고 한다. 혈통관계를 지독하게 따지는 민족이 유대인이다. 이는 세계가 인정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택한 백성이라는 것,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이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마리아인 역시 유대인이지만 혼혈 유대인이다. 그래서 그들이 유대인에게 지독하게 차별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순수 이스라엘 족속이란 사실을 자랑거리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그것을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버렸다. 그 다음에 나는 베냐민 지파요.’ 라고 한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왕을 배출한 지파다. 게다가 분열왕국이후 유다 지파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했던 지파다. 민족의 정통성을 지킨 지파출신이라는 자랑도 버렸다.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라고 한다. 이는 사상적 순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①~④까지는 자신의 혈통적 순수성과 사상적 순수성을 자랑한 것인데, 이런 자랑거리를 모두 배설물처럼 버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는 그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한다. 이는 유대교와 율법에 헌신적으로 충성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민족, 혈통, 학문, 종교적 열심, 율법적으로 빛나는 삶, 신분을 비롯하여 자신의 특권도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그냥 버린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해(害)로 여겼다.’(8).

 

그를 위하여

우린 이와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육체적으로 신뢰했던 것, 내게 유익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다. 찬양가사처럼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찬양처럼 쉽지 않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고 사소한 습관하나 고치는 것도 어렵다. 그러니 내게 유익하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의 길을 좁을 통과한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마7:13,14).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다.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조건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들을 왜 버렸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7),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8).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주님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들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본문에 ‘해로 여기다’는 말씀이 7절(“해로 여길뿐더러”)과 8절(“해로 여김은”)에 두 번 나온다. 그런데 그 시제가 앞의 단어(7)는 ‘완료형’이고, 뒤의 단어(8)는 ‘현재형’이다. 이는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버리는 결단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가끔 주변에서 보면 은혜를 받았을 때는 스스로 감격하여 이것저것 버리겠다고 결단했다가 얼마 후에 보면 버렸던 것들을 다시 챙겨드는 사람을 흔히 볼 수가 있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사실 하루에도 놨다 들었다 하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바울은 처음의 그 결단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앞에서 말한 대로 세상 그 무엇도 주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절대가치로 여겼던 것이다(마13:44/ 보화를 발견한 농부, :45,46/ 큰 진주를 발견한 진주장사비유 참고).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보배신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나를 얼마나 빛나게 하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이전에 좋아했던 것,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이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즐겁게 포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얻고도 주님을 얻지 못했다면 그 인생은 헛것이다. 비록 세상에서 얻은 것 없고, 얻은 것까지 모두 잃어다하더라도 주님을 얻었다면 그는 충만한 인생이다. 바울은 이 주님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버렸다.

 

버리면 얻는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고, 신앙의 역설이다. 특히 8,9절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얻고”(8),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9). 잃음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를 빛나게 하고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지 결코 가난하고, 궁색하고,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버리라는 말씀의 참 뜻은 더욱 귀한 것으로 채우기 위한 전제다.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받으려면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보배로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여기서 배설물이란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는 것’이란 뜻이다. 심지어는 해로 여기며 미련없이 버렸던 것이다.

 

호더스 증후군(Hoarders syndrome)

호더스 증후군’(Hoarders syndrome)이라는 말이 있다. 번역하면 ‘저장 강박증’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병이다. 이는 필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충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집안에 쌓아두기만 하는 증상을 말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잠재적 호더(Hoarder)다. 버려야할 것은 물건뿐만 아니다. 독한 말, 악한 행동, 잘못된 신념, 나쁜 습관을 비롯하여 지난날의 좋지 않은 기억, 아픈 상처, 해로운 감정(시기, 질투, 불평, 불만, 원망 등), 경건하지 못한 생각,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태도, 만족을 모르는 욕심 등 정말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서도 버려야할 것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덜어내기는커녕 시간과 함께 쌓고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또한 잠재적 호더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덧셈만 외치고 있다. 여기에 교회도 신자도 덩달아 맞장구를 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12:1),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고 말씀하신다. 특히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제대로 된 뺄셈을 실천하여 마음도 생각도 생활도 집도 활짝 넓혀보자! 그래서 버리는 기쁨을 누리자! 그러면 주님으로 충만한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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