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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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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83회 작성일 17-04-1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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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차이를 만든다.

막16:1~8

2017. 4/16. 11:00(부활주일, 세례와 성찬식)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

고난주간이고 하여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셴키에비치의 소설 「쿼바디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쿼바디스’를 봤다. 로마황제 네로시대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의 박해를 다룬 내용이다. 황제는 기독교인에게 로마시내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란 죄명을 씌워 불로 태워죽이고, 굶주린 맹수의 먹이가 되게 하고, 십자가에 처형한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 신앙을 포기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고 즐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도 살라달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면서 죽어갔다. 그리고 죽은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의외의 모습에 놀란 것은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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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내게 도전이 되었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끔찍한 죽음의 공포를 믿음으로 바꾸어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즐겁게 죽음을 맞이한 모습이다. 이런 일이 지금 내 앞에 닥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웃을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웃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쿼바디스의 주제-‘권력을 이긴 믿음, 그 믿음을 부른 사랑, 그 사랑으로 바뀐 로마’-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고 했다(1요4:18). 주님을 향한 사랑이 태우는 불꽃을 이기게 하고, 굶주린 맹수의 발톱과 이빨을 이기게 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게 한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게 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찬양하게 하고, 무슨 일을 당해도 웃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에서 기도가 끊기고, 찬양이 힘들고, 불평의 지수가 높아진다 싶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온도계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이 모두는 사랑이 식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랑은 이끄는 힘이다.

사랑은 이끄는 힘이다. 사랑하면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대상에게 끌리게 된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운동에 끌리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게임에 끌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에 끌린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에 끌리고,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술에 끌린다. 이 사람에겐 1년 내내 술 먹을 일만 생긴다. 아니 술 먹을 일만 찾는다.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몸도 마음도 항상 주님께 끌려 살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로 가까이, 주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우리를 주님께로 이끄는’ 힘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힘이다. 본문에 나온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명)그녀의 이름이 성경에 적극적으로 등장한 것은 주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면서부터다. 지금까지는 뒤에서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섬겨왔는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자 제자들은 흩어져 숨어버렸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 성모 마리아, 살로메(요한의 어머니),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엔 이 이름의 순서가 바뀌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항상 가장 먼저 나온다(막15:41,47, 16:1).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관련해서는 아예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만 나온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목격자, 또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9~11).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었고, 주님을 위한 일에 가장 앞장섰다는 뜻이다. 이것이 주님을 가까이 하고, 앞장서서 주님을 섬긴 사람들이 누리는 복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주님께 가장 가까이, 주님의 일에 가장 앞장서게 하여 이런 복을 누리게 했을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녀를 주님께로 이끈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곁을 지키게 했고, 꼭두새벽(3시~6시)에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게 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심지어는 제자들보다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부활의 증인 되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 차이를 만든다. 사랑이 믿음의 차이를 만들고, 사랑이 기도의 차이, 사랑이 감사의 차이, 사랑이 섬김의 차이를 만든다. 열정의 차이를 만들고, 헌신의 차이를 만든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만약 천국에도 서열이 있다면, 그 서열은 제자라고 해서, 어머니라고 해서, 사도라고 해서, 혹은 목사나 장로라고 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리라 생각한다.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또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신분이나 출신이 형편없는 사람일지라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심리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렇게 말했다. ‘심리적인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에 비례한다.’ 심리적으로 멀어지면 물리적인 거리도 멀어지고, 심리적으로 가까워지면 물리적 거리도 가까워진다. 그래서 그는 관계의 친밀도를 거리로 표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연인은 15㎝~46㎝, 친구나 직장동료는 46㎝~120㎝의 거리를 가진다고 했다. 관계의 친밀도가 높을수록 물리적 거리가 짧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우면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심리적으로도 멀어진다. 가까운 사람도 안보면 멀어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한 사이일수록 자주 만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없는 마음도 생기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주님과의 마음의 거리, 영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주님과의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의 몸인 지체들과 자주 만나서 교제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섬기는 방법인 예배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의 영적 교제인 기도생활을 쉬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주님을 사랑해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런 것들이 거룩한 습관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훈련을 하다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물리적인 거리는 심리적 거리, 영적인 거리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님과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서 우리 역시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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