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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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801회 작성일 17-03-19 12:46본문
사랑을 보이라!
눅7:36~50
2017. 3/19. 11:00
가장 먼 길
어느 신문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공모했다. 이 공모에서 1등으로 뽑힌 답이다. 그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한다. 아는 바를 가슴으로 느끼고, 느낀 것을 발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뜻이다. 물론 몰라서 못하는 것도 많다. 하지만 알아도 실천하지 않아 낭패를 당하거나 평생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무튼 지식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소할지라도 실천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문제는 아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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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등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졸업을 앞둔 학생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다가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한다. 너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당신은 내게 특별한 사람입니다.’ 라는 문구가 쓰인 리본을 달아주었다. 학생들이 무척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본 선생님은 며칠 후 학생들에게 리본을 3개 씩 나눠주면서 말했다. ‘이 리본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달아주어라.’ 얼마 후, 한 학생이 이를 실천했다. 이 학생은 자신의 직업실습을 도와준 부사장에게 리본을 달아주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부사장님은 정말 특별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다. 부사장은 실습생의 이 말에 무척 행복해 했다. 이 학생은 부사장에게 리본 두 개를 주면서 ‘하나는 부사장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아주시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동일하게 누군가에게 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리본을 받은 부사장은 회사에서 평이 별로 좋지 않은 사장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는 사장을 찾아가서 ‘사장님, 사실 사장님은 정말 멋진 리더십니다.’고 격려하며 리본을 달아드렸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아주라며 리본 하나를 건넸다. 부사장에게 리본과 함께 격려의 말을 들은 사장은 정말 행복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사장은 아들 방으로 들어가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아,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란다. 많이 힘들지? 힘내라!’고 하면서 힘차게 안아주며 가슴에 리본을 달아주었다. 그러자 아들이 눈물을 쏟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감사해요. 요즈음 극단적인 생각을 할 만큼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에 다시 힘을 얻었어요. 제게 아버지는 정말 소중한 분이에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작은 실천, 큰 감동’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이런 멋진 ‘격려운동’을 선생님이 한 것으로 멈췄다면 1회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를 실천하다보니 감동의 물결을 이루어 깨진 관계가 회복되고, 한 인생, 한 가정의 비극을 막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작은 실천이 이런 놀랍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본문은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주님을 감동하게, 감격하게 만든 사람의 이야기다.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36). 바리새인들이 드러내놓고 주님을 대적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그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람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잘 알려진 한 여인이었다(37). 본문이 이 여인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주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38).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초대를 받지도 않았고, 그것도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님께서 그녀의 행동을 막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잔치를 마련한 주인 입장에서 이와 같은 주님의 행동이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의혹을 품었다(39). 당시 바리새인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聖/俗),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淨/不淨)으로 분리를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분리한다고 하여 바리새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과의 접촉을 철저히 금했다. 그들이 주님께서 죄인이나 세리, 창기와 함께 하신 것을 비난(눅15:1,2)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죄인인 이 여인의 접촉을 허락하고 있어 시몬이 주님께 의혹을 가진 것이다.
사랑함이 차이를 만든다.
주님은 주인 시몬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시고, 이 여인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 500데나리온과 50데나리온의 빚을 진 두 사람이 있는데, 둘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주인이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에 주었다. 둘 중에 누가 더 주인에게 감사하겠느냐?(41,42). 둘 중에 누가 더 감사하고,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는가? 물론 빚을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다. 지금 이 여인의 심정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시몬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한 마디로 손님을 접대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그는 손님초대의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손님을 초대하면 주인이 직접을 물을 떠다가 손님의 발을 씻겨주었다(창18:1~4). 여의치가 않은 경우엔 하인을 시켜서라도 손님의 발을 씻겨주었다. 그리고 환영의 표시로 신체의 일부에 입을 맞추고, 머리에 감람유를 부어주었다. 이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였다. 그런데 시몬은 주님을 초대하였지만 발을 씻어주기는커녕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않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44~46). 주님을 초대했지만 기본적인 에티켓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은 초대한 사람을 무시한 행위다. 유대사회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초대하고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 여인은 주님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적시며 머리털로 닦고,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고급)향유를 주님의 발에다 부었다(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동사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이 여인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음). 그러자 향기가 주변을 진동시켰다.
그렇다면 주님을 대하는데 시몬과 이 여인의 태도에 이와 같은 차이가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깨달음’(은혜의식)의 차이이고, 또한 ‘사랑함’의 차이다. 본문에서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했다(43,47).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많이 깨달은 사람(은혜의식이 큰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깨닫지 못하면 감사도 보답도 없다. 깨닫는 만큼 감사도 하고, 깨닫는 만큼 보답도 한다. 깨닫는 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함 만큼 섬기게 된다. 이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니까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고, 거기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 이런 감격스러운 섬김이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은혜를 깨닫지 않고서 어찌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받은 은혜,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달으면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사랑하면 이 여인처럼 감격스럽게 섬기게 된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여기 있다.
감격하고 있는가?
세 종류의 신자가 있다. 첫째는 호기심만 갖는 신자(curious christian)이다. 이런 신자는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것(listen and sits)으로 만족한다. 그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둘째는 확신에 찬 신자(convinced christian)다. 이런 신자는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listen and says). 확신을 가지고 말은 잘하지만 그것이 행동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는 헌신된 신자(committed christian)다. 이런 신자는 말씀을 듣고 섬기는 사람이다(listen and serve). 들은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점은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많은데, 들은 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헌신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헌신하는 사람이 적다. 사랑은 말하지만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처럼 감동을 주고, 감격하게 하고, 향기를 퍼뜨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여인을 보면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신자로서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이 여인처럼 주님께 감동을 드리고 주님을 감격하시게 하는 것, 그리고 주변에 좋은 향기를 퍼뜨리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왜곡된 자본주의 문화에 찌든 나머지 성공주의에 매몰이 되어 그렇지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감격하게 하고, 향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잘 산 것이고,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특히 신자로서 주님께 감동과 감격을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이 잘 믿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나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이 감격하고 있는가? 아내가, 남편이, 자녀와 부모가, 이웃이 감격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로 인하여 감격하고 계신가? 주변에 좋은 향기가 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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