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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주고 품어주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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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702회 작성일 17-04-3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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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주고 품어주는 사랑

골3:12~15

2017. 4/30. 11:00

넌 꺼져! 이리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부부 이야기다. 5살짜리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아이가 가장 먼저 배워온 단어가 ‘넌 꺼져!’ 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이는 자신들의 무리에서 이 아이를 ‘왕따’시키는 거절의 말이다. 피부색이 다른 이 동양 아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는 뜻도 모르고 집에 와서 그 단어를 열심히 말하고 다녔다. 이를 바라본 부모의 마음이 착잡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독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으로 아이를 옮겼다. 교회 유치원에서 아이가 배워온 첫 단어는 ‘이리와!’ 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이는 환영의 말, 수용의 말이다. 피부색도 다르고 처음 온 아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 부부의 아이가 세상에서 배운 첫 단어가 거절의 언어였다면 교회에서 배운 첫 단어는 환영의 언어, 수용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세상과 교회, 세상 사람과 성도의 차이를 실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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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공동체가 어떤 곳인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누구든지, 특히 세상에서 거절당하고, 상처받은 사람까지 ‘어서와’ ‘이리와’ 하며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받아주고,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야말로 예수님의 삶을 가장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당신에게 오는 자를 환영하고 영접하셨다. 그가 죄인이든, 세리든, 창기든, 이방인이든, 물론 항상 주님과 갈등관계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셨다. 예수님이 가신 곳마다 사람으로 붐빈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환영하시고 받아주시고 품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를 보면 벽이 너무 많다. 진영의 벽, 이념의 벽, 지역의 벽, 인종의 벽, 신학의 벽, 교리의 벽, 교파의 벽.......그래서 이것이 교회인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참 그리스도인의 표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에 넣어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 잘 지냈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집어넣었다. 그들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서로 잘 어울렸다. 그 다음에 나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곳에 있게 했다. 그들은 결코 잘 지내지 못했다.’ 교파의 벽, 교리의 벽, 신학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분열을 일삼는 신자(교회)를 해학적으로 풍자한 것이다. 한 마디로 신자의 포용력이 개나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본능대로 미워하고 복수하고플 때, 우리는 짐승이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살고자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축복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 한 번 따라해 보자! 성도는 내게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축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을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에 비유를 하고 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도 옷이란 신분과 직업적 소명의 상징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회자 가운을 비롯하여, 재판관의 법복, 경찰관이나 소방관, 교도관의 제복, 의사나 간호사의 가운 등이다. 이렇게 옷은 다른 사람에겐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당사자에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다. 옛날에는 이것이 더욱 철저했다. 그래서 신분이나 직책에 따라 옷이 달랐다. 따라서 신분이 바뀌고, 직책이 바뀌면 그에 걸맞게 옷도 바뀌었다. 특히 바울서신에 옷을 입고 벗는 것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택하여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이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12). 그것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오래 참음’이라는 아름다운 성품의 여러 고운색깔로 만들어진 구원의 옷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상징하는 옷이다. 이렇게 구원의 옷을 잘 차려입은 성도는 이에 걸맞게 행동을 해야 한다. 본문은 구원의 옷을 입은 성도가 해야 할 일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는 것’(13)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15)이다. 이 시간에는 13절 말씀을 중심으로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용납한다는 것

본문은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13) 라고 권한다. 여기서 용납과 용서는 ‘용’(容)자 돌림의 형제지간과 같다. 둘 사이는 차이가 거의 없다. 굳이 구별하자면 용서(容恕)는 상대방의 과실을 없애주는 것이고, 용납(容納)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문에 용납하면 용서가 되고, 용서하면 용납할 수 있다. 우리 성경에서 ‘용납’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헬라어로 ‘아넥쏘메노이’(ἀνεχόμενοι)인데,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한다. 용납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잘 참아내는 것이다. 맞받아치지 않고 안으로 삭히며 참고 견뎌야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납이 없으면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용서나 화해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용납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어렵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눌러서만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자신이 죽어야 가능하다. 살면서 서로 충돌이 발생한 것은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죄의 본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납에는 참고 견디는 자기희생이 따르게 된 것이다. 용납한다는 것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용납한다는 것은 건강함을 증거다. 깨진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깨진 마음, 상처난 심령은 누구도 품을 수가 없다. 오히려 상처만 줄 뿐이다. 자신이 괴로우니까 상대방을 괴롭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방실거리며 예쁜 짓만 골라하던 아이도 아프면 칭얼대며 보챈다. 아프니까 힘드니까 그런 것이다. 받아주고 품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영/육간에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용납한다는 것은 성숙함의 증거다. 흔히 우린 아이들에게 ‘니가 언니니까 이해해라! 오빠니까 양보해라! 누나니까 참아라! 형이니까 용서해라!’고 말한다. 용납은 언니나 오빠, 누나나 형처럼 큰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받아주고 품어주는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품을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자기 하나도 건사가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삐지고 화내고 다툰다. 사탕 하나를 가지고도 치열하게 싸우고, 서럽게 우는 것이 아이들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도 성숙하면 더 큰 것, 더 중요한 것,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베풀게 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용납한다는 것은 크다는 증거다. 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수용성에 있다.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느냐가 그릇의 크기를 결정한다. 1ℓ의 양이 들어가면 1ℓ 크기의 그릇이고, 100ℓ가 들어가면 100ℓ 크기의 그릇인 것이다. 바다가 큰 이유는 세상의 모든 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접시 물은 작은 돌멩이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 작은 연못은 개구리 한 마리만 뛰어들어도 큰 파장이 있다. 하지만 큰 바다는 거대한 유람선도 감쪽같이 삼켜버리고, 우리 교회만한 바위를 던져 넣어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품어버린다. 사람의 크기도 마찬가지다. 키가 크고 몸무게가 많다고 하여 큰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커야 큰 사람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하고 성숙하고 마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

어떤 분이 교회에 대하여 아주 멋진 말을 했다.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은 내용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교회는 박물관이 아니다. 옛날을 뒤돌아보기 위해서 한두 번 거쳐 가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경기장이 아니다. 몇몇 사람만 열심히 뛰고, 나머지는 관중석에 앉아서 응원이나 야유를 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7일 만에 열리는 장터가 아니다. 이해관계로 모인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대합실이 아니다. 잠시 모였다가 각각 다른 목적지를 향해 흩어져 버리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물웅덩이가 아니다. 날마다 생수가 흘러서 갈증을 해결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피난민 수용소가 아니다. 끼리끼리 웅크리고 앉아서 웃음도, 핏기도 없는 얼굴로 불안 초초해 하는 그런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쉬어가는 휴게소도 아니다. 옆 사람이 누군지 관심도 없이 제 볼 일만 보고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야전병원이다.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상처입은 사람을 치료하고, 회복시켜서 다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신병 훈련소다. 서툰 신병이라도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고, 신병 훈련소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야전병원이고, 또한 신병 훈련소라고 한다면 성도가 어떤 존재이고,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욱 분명해 진 것 같다. 그것은 잘 치료받고 훈련을 받아 영적으로 건강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영적 거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고 품어주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세상도 관계도 교회도 가정도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받아주고 품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유능한 사람, 힘 있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따뜻하게 품어주고, 넉넉하게 받아주는 사람이다. 우리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세상 사람과 성도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성도, 우리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비로소 세상과 교회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 특히 함께 힘을 모아 이런 교회를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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