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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위한 터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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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74회 작성일 17-03-2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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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위한 터 닦기

딤전6:17~19

2017. 3/26. 11:00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항해하던 배가 폭풍을 만나 파선했다. 선원 한 사람이 작은 널빤지를 타고 표류하다 구사일생으로 외딴 섬에 도착했다. 그 섬에는 아주 이상한 풍습이 있었다. 누구든 풍랑을 만나서 그 섬에 오면 1년 동안 왕이 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1년이 지나면 그 섬을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왔던 그대로 가야했다. 널빤지를 타고 왔으면 널빤지를 타고 가고, 헤엄쳐 왔으면 헤엄쳐서 가야하는 것이다. 선원은 섬 주민에게서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놀라 물었다. ‘혹시 나보다 먼저 와서 왕이 되었던 이는 있었소?’ 그들은 두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살다갔냐고 물었다.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은 왕이 된 후 섬 중앙에 큰 집을 짓고, 모든 진귀한 보물을 쌓아놓는 일을 하다 1년이 되어 떠나갔는데 타고 온 널빤지를 타고 가다 빠져 죽었고,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한 것을 보고 가지고 가지도 못할 것을 쌓아놓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말하면서 자기는 실컷 먹고 놀겠다며 이것저것 좋다는 것을 마구 먹어 배가 항아리처럼 되더니 1년이 되는 날, 첫 번째 사람의 절반도 못 가서 빠져죽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물었다. ‘이제 당신이 세 번째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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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번째 사람이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했다. 그는 먼저 섬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돌 때 그 섬을 보지 않고 멀리 바다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저 멀리 있는 한 섬을 발견했다. 그 섬은 무인도였다. 그는 그 무인도를 보고 비로소 할 일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섬 주민에게 왕으로서 명령했다. ‘저 무인도에 집을 지어라! 그리고 거기에 밭을 만들어 곡식을 심어라!’ 그는 그 무인도를 가꾸는데 정성을 다 했고, 드디어 그가 섬에 온지 1년이 되었다. 섬 주민은 그가 타고 온 널빤지를 내어주며 섬을 떠나라고 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섬 주민을 시켜서 이미 잘 가꿔놓은 무인도를 향해, 섬 주민이 보는 앞에서 널빤지를 타고 콧노래를 부르며 갔다. 그가 앞의 두 사람과 달리 무사히 섬을 떠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섬을 보지 않고 멀리 바다를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1년 후 자신이 가야할 곳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사실 이 외딴 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고, 이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이 확실한 것처럼 떠나야하는 것도 확실하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왔었고, 또한 갔다. 누구도 무엇을 가지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에게 있는 한 가지 다행한 것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하나는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무엇에 두고 사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준비의 문제다. 본문은 교회 안의 부유한 지체에게 주신 말씀이다(내용설명 생략). 그런데 본문 역시 이 두 가지(관점과 준비)를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시각장애를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늘 긍정적으로 살았다. 앞은 못 보지만 할 수 있는 일과 직장이 있었고, 가끔 상냥한 목소리로 꽃을 전해주는 여인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왔다. 개안수술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자살한 이유는 세상이 자신의 상상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냥한 여인이고 여겼던 아가씨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남의 지갑을 훔치는 소매치기였고, 그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느꼈던 도시는 폭력과 폭행이 난무하고, 노숙자가 널브러져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감당할 수 없다.’며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보게 되면서 불행해졌다고 한다. 볼 수 있게 되면서 온갖 나쁜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뜬 것이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까? 사실 그의 불행은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니다. 볼 수 있어서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불행해진 것은 나쁜 것만 보았기 때문이다.

 

땅의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라!

그렇다. 본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고,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침햇살을 보면 세상이 환해 보이고, 먹구름을 보면 세상이 어둡게 보인다. 불행에 초점을 맞추면 행복해 질 수가 없다. 행복에 초점을 맞추면 불행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보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게 된다. 이런 영어 문장이 있다. ‘God is nowhere!’ 어떤 사람은 이 문장을 ‘God is no where!’(‘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뜻) 라고 읽고, 어떤 사람은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뜻)로 읽는다. ‘Hope is nowhere!’ 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이런 차이는 전적으로 ‘보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다. 대상이나 사실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의 시선관리, 관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17). 우선(소극적으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권한다. 여기서 ‘정함이 없다.’(αδηλοτητι)는 말은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것으로 ‘재물’을 특정(特定)하고 있다. 이는 본문이 교회 안의 부유한 지체를 대상으로 한 교훈이다 보니 그런 것이다. 실재로는 재물은 이 세상의 모든 불확실한 것의 대표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재물을 단순히 ‘부’로 번역하지 않고 ‘맘몬’(物神)으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 성경도 재물을 하나님과 대비(對比)하고 있다. 사실 불확실한 것은 재물만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명예도, 권세도, 건강도, 생명도, 이 세상도, 나라도, 사상도 모두가 불확실성의 덩어리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것은 불확실한 것이니 여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들을 신뢰하지 말고,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불확실한 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면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대신(적극적으로),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목표로 삼고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특성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모든 것을 ‘후히’(풍성히, 넉넉히, 넘치도록) 주시는 분으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정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충분히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함이 없는 것들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막을 건너는 6가지 방법」이란 책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사막을 성공적으로 건너기 위해선 지도가 아니라 나침반을 보라고 한다. 사막은 수시로 지형이 변하기 때문에 지도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지도에 표시된 어떤 길도 언덕도 오아시스도 모래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와 같은 사막의 특성도 모르고 지도만 의지하고 길을 떠났다간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신 나침반은 변하지 않는다. 모래바람이 분다고 하여 지구의 방위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침반이 필수라고 한 것이다. 인생은 지형이 수시로 변하는 사막과 같다. 이런 인생길을 성공적으로 가기 위해선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을 신뢰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나침반이 본문의 표현으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라야 이 땅 위에서 18,19의 삶이 가능해 진다.

 

붙어가는 놈

12간지(자, 축, 인, 묘.......)의 동물들 순서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달리기를 시켜 결승선에 들어온 순서에 따라 정했다고 한다.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짐승이 쥐, 그 다음이 소, 호랑이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작은 쥐가 소나 호랑이보다 먼저 도착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가장 부지런히 잘 달리는 소의 등에 붙어 있다가 소가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에 뛰어내려 1등이 되었다고 한다.

 

속담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있다. 뛰어가는 사람보다 날아가는 사람이 한 수 더 위라는 뜻이다. 그럼 ‘나는 놈’보다 한 수 위는 어떤 놈일까? ‘붙어가는 놈’이다. 뛰는 놈도 지치고, 날아가는 놈도 결국 지치겠지만 붙어가는 놈은 지치지 않는다. 자신의 힘을 쓰지 않고 붙어있기 때문이다. 쥐처럼 말이다. 생기사귀(生寄死歸)라는 말이 있다. ‘사는 것은 붙어사는 것이고,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산다는 것은 붙어사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무엇에 붙어사느냐다. 만약 우리가 세상 물질에 붙어살고, 마귀에게 붙어산다면 어떻게 될까?(찬송가 522장 2,3절이 답) 우리가 비록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혹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힘없는 쥐와 같을지라도 주님께 붙어있기만 한다면 범사에 승리할 수 있다. 주님께 붙어있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넘지 못할 산이 없고, 못 건널 강이 없다. 이기지 못할 적이 없다. 열매 맺는 풍성한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꽉 붙어사는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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