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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화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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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48회 작성일 14-09-2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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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화평함’

히12:14~17

2014. 9/28. 08:00, 11:00

peace maker & trouble maker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려고 할 무렵(13c 초), 많은 순회설교자들이 유럽의 각 나라를 다니면서 이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퍼뜨렸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 ‘이슬람을 죽이자. 예루살렘을 되찾고 이슬람을 몰살하자.’는 미움이 꽉 들어찼다. 결국 그 미움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전쟁터로 나아가는 그 행렬을 보고 한 젊은 수도사가 탄식하며 유명한 예언을 했다. ‘이 전쟁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적개심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전쟁을 주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패배할 것이다.’ 이렇게 미움과 증오의 노예가 되어 사람을 죽이러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나름대로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것은 ‘평화의 십자군’이었다. 칼과 창 대신 성경을 들고 주님의 사랑으로 적군을 품고, 그들에게 사죄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다. 그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훗날 유명하게 된 기도를 드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다툼과 갈등이 있다가도 그 사람만 들어가면 웃음과 화해의 장이 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분위기에도 그 사람이 들어가기만 하면 긴장과 갈등이 생기고,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전자를 ‘화평하게 하는 사람’(peace maker)이라 하고, 후자를 ‘문제를 만드는 사람’(trouble maker)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되는가?

 

화평해야 형통하다.

화평이란 더불어 잘 되게 하고, 더불어 잘 살게 하고, 더불어 평안하게 하고, 더불어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관계가 평안해야 만사가 형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평은 모든 사람의 소망이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이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갈등의 역사, 인간이 인간에게 짐승이 되는 전쟁의 역사였다. 인간사회를 양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정글’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학자 듀런트(W. Durant)는 「역사의 교훈」이란 그의 책에서 3,500년 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86년에 불과하다고 했다. 앨빈 토플러도 2차 세계대전이후 냉전이 끝난 1990년까지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3주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지불한 사회적 갈등비용이 246조가 넘는다. OECD국가들 중에서 2번째다. 그 만큼 우리 사회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수많은 전쟁이 평화를 위해 벌어졌다는 것이다. 지금 아시안 게임이 인천에서 열리고 있는데, 이런 스포츠 축제를 흔히 평화의 제전(祭典)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도 그 속내를 보면 승리를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운다. 결국 명분은 평화지만 치열한 메달 다툼인 샘이다. 이와 같이 전쟁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끝내야만 평화가 찾아오는데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하니 이것이 죄악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평의 역설이다.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결국 이것은 화평이란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도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화평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화평을 위한 제물이 되어주셨고(롬3:25), 또한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는 사람’(peace maker)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을 보는 길

본문 14절이 소개하고 있는 ‘화평함’과 ‘거룩함’은 신자가 지녀야 할 중요한 미덕이다. 신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좇는 동시에 스스로 중심의 거룩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모든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말이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도 썩게 된다. 화평이 없이 거룩만 추구하면 ‘독선’에 빠지기 쉽고, 거룩이 없이 화평만 추구하면 세속적으로 ‘변질’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평함과 거룩함의 이 두 미덕의 조화는 신자에게 중요한 숙제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위 보수적인 사람들에겐 화평함이 부족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겐 거룩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보수적인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이고 혼합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본문은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화평함과 거룩함이 주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란 뜻이다.

 

여기서 ‘주를 본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이고, 믿음의 가장 신비한 경지를 의미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고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주님을 볼 수가 없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화평하게 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평함과 거룩함은 주님을 볼 수 있는, 즉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길이다. 특히 본문의 앞 부분(1~13)은 여러 어려움 증에도 인내로 경주해야 할 믿음에 대한 교훈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려운 시련을 견디다보면 자칫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굳어져서 주변 사람들과 화평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것은 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화평’은 고난 중에 인내한 신자가 지녀야 할 아주 중요한 미덕이다.

 

화평의 방법

그리고 이어서 15,16절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지 못하게 하여 주님을 보지 못하고, 은혜에 이르게 하지 못한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이다(15). 물론 16절에서 ‘육신의 욕망망령된 것’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역시 쓴 뿌리에 포함된다. 우린 흔히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교회가 화평하지 못하고, 그리고 관계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를 말할 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환경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 때문’, 혹은 ‘무엇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은 화평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이라고 한다. 그것도 자기 안에 있다고 한다. 육신의 욕망, 망령된 것과 같은 쓴 뿌리를 비롯하여, 시기와 질투라는 쓴 뿌리,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쓴 뿌리, 분노라는 쓴 뿌리, 불평과 원망이라는 쓴 뿌리, 교만이라는 쓴 뿌리,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쓴 뿌리 등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것들이 모든 화평을 무너뜨리는 주범이다.

 

그러므로 화평을 위해선 먼저 내 안에 있는 이런 쓴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해와 양보’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해는 자신을 ‘낮추는 것’(under+stand)이고, 양보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 위해선 자신의 희생이 따른다. 이해와 양보, 그리고 희생이 화평을 만든다. 이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값진 선물이 화평이다. 이를 우리 주님의 삶이 잘 보여준다.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 우리와 우리 사이를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두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시고 섬기는 종이 되셨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희생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셨다(peace maker).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자.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주님의 소원

어느 부부가 오랫동안 서로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을 결정하고 물건을 나누게 되었다. 다 나누었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 사고로 죽은 아이의 유품이었다. 다 없앤 줄 알았는데, 이것 하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이의 일기장이었다. 부부는 이것을 놓고 또 서로 가져가겠다고 다투었다. 참으로 막장부부였다. 그러다가 그 일기장을 우연히 열어보게 되었다.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엄마 제발 싸우지 마세요.’ 이 글을 본 순간 부부는 기가 막히고 목이 메었다. 마주 보다가 무심결에 서로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아이의 소원을 이루어 줍시다.’고 말하며 다시 화해를 했다. 어린 자식의 걱정거리가 된 못난 부모이지만 늦게나마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우리도 주님께 걱정만 끼치는 못난 자식인 것 같다. 지난 주일에 주님의 가장 간절한 소원인 전도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화평 역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다. 우리로 인해서 가정이 화목하고, 교회가 화평하고, 직장이 화평하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이다. 주님은 내가 있는 곳이 나로 인하여 평안해지고, 화목해지고, 평화로워지고, 화평해지기를 바라시고, 내가 있는 곳을 화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소원을 들어드립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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