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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救國)의 기도자, ‘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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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62회 작성일 14-06-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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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救國)의 기도자, ‘느헤미야’

느1:1~11

2014. 6/15. 08:00, 11:00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바벨론 포로이후 예루살렘은 ‘4D’의 도시가 되었다. 멸망(Destruction), 황폐(Desolation), 위험(Danger), 무질서(Disorder)가 그것이다. 그 번창하고 화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았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시대의 참상을 ‘매일 매일 모든 길에는 시체가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의 참담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런 도시, 이런 곳을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몸은 이국만리(異國萬里)에 있는데 마음과 생각, 눈과 귀는 항상 그곳으로 향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느헤미야’다.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Abraham J. Heshel)은 「예언자들」(The prophet)이란 책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을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약예언자들이라는 것,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쓰셨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고,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세상, 교회답지 못한 교회, 연약한 인간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아파하고 안타까워서 탄식하게 된다. 이것이 복음서에 나온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의미 있는 일은 이런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뤄진다. 좋은 치료자는 병자를 아파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아파하는 사람이 진정한 중보자다. 전도도 그렇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아파하는 마음에서 전도가 시작이 된다. 느헤미야가 바로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들려온 비보

느헤미야는 당시 가장 강력한 통치자 페르시아의 황제 아닥사스다(Artaxerxes) 1세의 술시중 드는 관리였다(11). 술시중 드는 관리는 왕에게 잔을 건네기 전에 그 술잔의 술을 맛보는 것이 임무였다. 이는 직위는 낮지만 중요한 직책이다. 통치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치자의 신변보호는 제국의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다. 포로민의 후손인 그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 발탁이 된 것은 그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고,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섭리다. 이렇게 대제국의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개인적인 모든 영달이 보장되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폐허가 된 자기 조국, 그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에게 항상 마음을 두고,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형제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와서 그에게 조국이 처한 현실을 말해주었다(2).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3).

 

이는 그가 어느 정도 예측한 일이지만 아무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바벨론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거의 1세기가 지났지만 그곳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이유는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벽과 성문이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4). 여기에 그가 사랑하는 동족이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 훼파된 예루살렘의 참상에 대한 소식을 듣고 취한 그의 행동이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했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말해 준다. 그는 자기 조국과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눈물의 사람, 그리고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깊은 영성을 소유한 기도의 사람이다. 특히 본문은 그의 기도와 영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올바른 상황인식

특히 여기서 그가 사랑하는 조국과 동족의 형편에 대한 소식을 ‘듣고’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닫힌 귀가 아닌 열린 귀의 소유자, 닫힌 눈이 아닌 열린 눈의 소유자, 닫힌 마음이 아닌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자기 조국과 민족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또한 그의 기도가 올바른 상황인식에서 출발한 기도였고, 그의 눈물이 단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에 대한 지각(知覺)의 눈물이었다는 뜻이다. 그의 눈물과 기도와 아파하는 마음이 올바른 상황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에 뿌리를 둔 기도와 영성, 이것이 그의 기도와 영성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느헤미야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을 준다.

 

우리 시대를 ‘무통’(無痛)의 시대, 혹은 ‘무통문명’(無痛文明)의 시대라고 한다. 아파할 줄 모르는 문명의 시대라는 뜻이다. 아주 소수긴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 대한 막말논란이 좋은 사례다. 이들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아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충분히 아파하는 것이다. 아파하는 마음없이 드리는 기도는 공허한 도피의 주문에 불과하고, 흘리는 눈물 또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가슴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값싼 동정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2:9)이라고 하였다. 이는 중보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와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선 아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똑바로 보는 눈과 그들이 토해내는 신음을 듣는 귀, 공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폐허가 된 자기 조국과 그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에게 항상 마음을 두고 있었던 느헤미야처럼 세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에게 우리의 눈과 귀,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피상적이고, 기도의 지경이 자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웃을 향해 눈과 귀,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들을 향해 아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과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시고, 또한 주목하신다.

 

동일시의 원리

고국에 대한 비보를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아파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한다(5). 특히 그의 기도에서 주목할 것은 철저한 회개다. 오늘날 조국의 황폐한 현실을 죄악의 결과로 규정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6,7).

 

그런데 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자기 민족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라고 고백하였다. 존 화이트(J. White)는 이를 느헤미야의 ‘공동체적 책임감각’(a sense of corporate responsibility)이고,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터득해야 할 ‘동일시의 원리’(the identification principle)라고 말했다. 진정한 회복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신앙의 깊이는 회개의 깊이다. 위대한 영적 거인들은 가슴 절절한 참회록을 썼다. 그런데 그 회개는 ‘나로부터’(From Me) 시작되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폐허가 된 자기 민족의 죄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죄를 지은 자기 민족의 범주에 끼지 않아도 됐다. 그는 이방 제국 한가운데서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의 죄를 자신과 자기 부모의 죄라고 고백하였다. 이는 공동체적 책임감 때문에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기도와 영성의 두 번째 특징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대개의 사람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민족을 동일시하며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것이 그의 훌륭한 점이다. 지도력을 이야기할 때 그가 중요하게 언급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세워주고, 속한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은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기도에 낯선 자는 하나님의 능력에도 낯설다.

한 실험에서 물을 채운 수조를 설치하고 빛을 차단한 다음 쥐를 넣었다. 그랬더니 3분 만에 그 쥐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서 가는 빛줄기를 비취었더니 36시간을 생존하였다. 무려 700배를 버틴 것이다. 여기서 빛줄기란 무엇을 의미할까? 희망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볼 수 있다면 그렇듯 끈질기게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빛과 같다. 어두운 인생을 밝히는 한 줄기 희망이다. 특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소망을 간직한 사람이다. 기도의 사람, 곧 소망의 사람이 길이 없는 곳에 길이 되고, 길을 만드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기도에 낯선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도 낯설다.’는 말이 있다. 기도의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느헤미야는 암울한 조국과 민족에게 길이 되고, 길을 만들어준 기적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그들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동일시하며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그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과 태도가 이 보훈의 달, 애국의 달을 보내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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