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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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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5,702회 작성일 14-09-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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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배움’

딤후3:13~14

2014. 9/14. 08:00, 11:00

알면 이해한다.

동물계의 영원한 앙숙(怏宿) 개와 고양이가 펜팔로 사귀게 되었다. 둘은 서로 사진까지 교환한 후, 만나기로 했다. 둘 다 설레는 마음으로 잘 꾸미고 만나러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멀리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너무 실망해서 만나지도 않고 돌아서버렸다. 고양이는 꼬리를 내리고 다가갔는데, 이 모습은 반갑고 즐거울 때 하는 표현이다. 반면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세우고 흔든다. 그래서 개가 꼬리를 올리고 흔들면서 다가가자 고양이는 개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실망했고, 개 역시 자기를 향해 꼬리를 세우지 않는 고양이를 보고는 실망했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오해는 무지에서 비롯되고, 이해는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혼율이 높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이혼율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이혼의 이유를 보면, 배우자의 부정이 7%, 경제문제가 13%, 가장 많은 것이 성격차이인데 47%다. 사실 성격차이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간에도 차이가 있고, 같은 부모에게서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그것도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는데, 그 차이는 너무 당연한 것이다. 만약 성격차이가 이혼의 원인이라면 그것은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 차이를 서로 잘 알지 못한 것 때문이다. 서로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되고 존중하게 된다. 그러면 서로의 차이도 이해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극복할 수가 있다. 이는 단지 부부관계뿐만 아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아는 만큼 누린다.

필립 얀시(P. Yancey)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바다와 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스페인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대륙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탄 배는 이미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다. 하지만 강폭이 너무 넓어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대서양에 떠있는 줄 알았다. 그때 그들 중 여러 사람이 죽었다. 그 원인은 갈증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바다위에 떠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의 한복판에 있었는데도 갈증으로 죽은 것이다. 바다와 물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자랑했던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결국 바다와 물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인간 지식의 한계와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아무튼 무엇이든 아는 만큼 누리게 된다. 반면 알지 못하면 스페인 선원들처럼 풍부한 생수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망하게 된다.

 

신앙생활도 아는 만큼 누린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 주전 750년부터 주전 722년, 이스라엘의 북(北)왕국이 멸망하기까지 활동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북(北)왕국의 멸망원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4:1,6, 5:4)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래서 선지자는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6:3)고 촉구하였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와 물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수 한복판에서 갈증으로 죽은 스페인 선원들처럼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있었지만 그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망하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삼위(三位)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풍성한 생활의 비결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 성경에 대한 배움을 강조한 것이다.

 

속고 속이는 악한 세상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책이다. 그리고 본문은 그 마지막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된다. 바울은 3장 1절에서부터 말세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본문이 그 결론이다. 바울은 13절에서 말세의 특징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여기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단사상을 가진 자들과 이런 자들의 영향을 받아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더욱 악하여져서 서로 속이고 속는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신자와 교회를 무너지게 하리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를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배고픈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대듯 사단과 그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신자와 교회를 그렇게 넘보고 있다(벧전5:8)고 하였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시대, 이런 사람들이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고 있는 시대,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자가 직면한 현실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단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다. 신자와 교회에 깊숙이 침투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신자를 미혹하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벌써 많은 신자들이 이들에게 미혹을 당했다.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바울은 이렇게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사랑하는 제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우선 이것을 알라”(1)고 하였다. 이것은 말세의 특징으로 말세의 특징을 잘 알라는 것이다. 다음은 이런 시대에 주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핍박이 따르게 되는데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라도 경건하게 살고자”(12) 힘쓰라고 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는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고 했다. 이것은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당부이자 말세를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다. 특히 중요한 것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신은 ‘어떤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신념’을 뜻하고, 거하는 것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물러 있는 것, 혹은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도 말씀(복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복음)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자들이 득세한 세상, 속고 속이는 살벌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경건한 삶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이단에 넘어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확신의 부족이다. 구원의 확신, 용서의 확신, 임재의 확신, 승리의 확신, 인도의 확신 등 이런 기본적인 신앙의 확신이 부족하다.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식물로 말하면 뿌리가 든든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고, 건물로 말하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다. 이렇게 확신이 부족하니까 작은 시험과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확신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확신에 거하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15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비롯하여 영적 성장과 인격적인 성숙은 물론, 성숙한 신자로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확대가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기초를 튼튼하게 놓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는 내리고(골2:7),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마7:24). 이와 같은 배움을 통해 우리 신앙이 자라고 믿음의 집이 든든하게 세워져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우리 안에 확신이 생긴다. 주님을 통한 구원의 확신, 용서의 확신, 인도의 확신, 승리의 확신, 치료의 확신, 회복의 확신 등.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힘써 배워야한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시1:2)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은 ‘힘써 배운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말씀을 즐거워하여 힘써 배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가뭄도 걱정하지 않고(렘17:8),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된다(시1:3).

 

배운다는 것

속도 없고 철도 없는 어떤 남편 이야기다.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남편에게 아기 좀 봐달라고 했는데 아기가 울어서 보니 남편이 아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나서 행주를 집어던졌더니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이번에는 세탁기 좀 돌려달라고 부탁하고 이상해서 가봤더니 세탁기를 낑낑대며 손으로 돌리고 있었다. 커튼 좀 쳐달라고 했더니 커튼 쪽으로 달려가서 커튼을 손으로 툭 쳤다. 아기 분유를 타라고 했더니 분유병을 깔고 앉아서 ‘이랴 이랴’ 하며 타고 있었다. 아기 목욕시키도록 욕조에 물 좀 받으라고 하니까 욕조를 머리로 들이받고 있었다. 답답하고 화가 난 아내가 그런 남편에게 ‘문 닫고 나가!’ 라고 했더니 한 시간 동안 나가지를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문을 닫아놓고 나가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이런 답답한 모습을 본 아내가 ‘내가 졌다. 가서 이제 그만 자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대꾸를 했다. ‘그만 자라니? 아직 잠도 안들었는데.......’

 

세상에 이런 남편은 없겠지만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지 않은지 모르겠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도무지 알아듣지도, 깨닫지도, 감동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엉뚱한 반응만 보이고 있다. 그러니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실까! 배운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나타난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 주님의 계획, 주님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다. 주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깨닫고, 감동하고, 실천하게 된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배우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배우면 변화하게 된다.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고, 더 깊은 은혜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배우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배우는데, 무엇보다 주님을 배우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더욱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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