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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돌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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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66회 작성일 14-09-0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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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돌아봄’

고전12:20~27

2014. 9/7. 08:00, 11:00

목발이란 친구

 

 다리를 다쳐 꼼짝할 수 없던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생겼습니다. 전 그 친구가 다가오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지겹도록 싫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말없이 늘 제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를 받쳐주고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그 친구와 친해지고 그에게 고마움을 느낄 무렵, 이제 제가 홀로 서기를 시작하자 그 친구는 누군가를 향해 떠나갔습니다. 그는 지금쯤 또다시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저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목발입니다.

 

 어느 분이 다리를 다쳐 한참 동안 목발에 의지하며 지냈던 시간을 글로 쓴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목발과 같은 친구가 계신다.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목발이시다. 상처받은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을 딛고 일어서도록 다리가 되어 주신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진통제가 되어주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그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되어주시고,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는 안락한 의자가 되어주신다. 헐벗은 사람에게는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시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양식이 되어주시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생수가 되어주신다. 늘 곁에 계시면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을 받쳐주며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목발이 되어주신 주님 때문이다.

 

서로 목발이 되라!

 신자는 서로에게 목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신자의 모습이다. 목발처럼 상처 난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신을 딛고 일어서도록 다리가 되어주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용기가 되어주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다. 이 땅에 교회와 신자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사명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목발이 되고 있는가? 우리 서로 목발이 되어주자. 무엇보다 교회와 지체들을 세워주는 목발이 되어주자!

 

본문은 바울의 교회론이다.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기 위해서 교회를 몸과 몸의 여러 지체에 비유하고 있다.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인 것처럼 교회 역시 다양성 속에서 일치(연합)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베드로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고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뉘어 여러 문제로 몹시 힘든 상태였다. 마치 찢겨져 여기저기로 나뒹구는 종잇조각처럼 신자들의 마음이 완전히 나뉘어있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편지인 교회의 역할, 신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바울이 1년 반이라는 긴 시간동안 피땀을 쏟아 일궈놓은 교회인데, 분열로 인해서 사단의 놀이터로 변해버린 것이다. 12장~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은사문제도 그 중에 하나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누구보다도 다양한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은사만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며 자랑과 교만을 일삼았고, 섬기라고 주신 소중한 은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하는 잘못에 빠졌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은사는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몸과 몸의 여러 지체를 비유로 지체가 여럿인 것처럼 은사도 다양하고, 모든 지체가 소중한 것처럼 모든 은사도 소중하고, 지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룬 것처럼 다양한 은사 또한 완전한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분쟁이 없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연합)을 이루기 위해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라는 것’(25)이다. 서로에게 목발이 되어주는 것이다.

 

서로 같이 돌아보는 것

돌아본다는 것은 마음과 몸이 자신을 넘어서 너에게로 향하는 전적 타자를 위한 행위다. 서로 돌아본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선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것, 그 사람이 하는 일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관심과 인정, 그리고 기다림이 서로 돌아보는 방법이다. 이것은 자신을 넘어서 타자를 향해 전적으로 열려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다양한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은사 때문에 갈등이 깊어진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서로 같이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 더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다. 어떤 분은 관심을 ‘나 아닌 타인에게 마음의 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재능, 내 마음과 정성, 내 삶을 조금 나눠주는 것이 관심이라는 것이다. 서로에게 오해나 갈등은 상대방을 위한 마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만 소중하고, 자기 것만 소중하게 여기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님이 주신 은사도 다른 사람의 것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고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다. 부족해도 연약해도, 아직은 서툴고 거칠어도 참고 기다려 주면 채워지고 다듬어지고 자라게 된다. 기다려주지 않는 것은 미처 자라기도 전에 꺾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서로 분쟁이 없는 것은 ‘서로 같이 돌아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

그렇다면 ‘왜 서로 같이 돌아보아야 하는가?’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 신자는 서로 불가분리, 상호의존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 같이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깊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고 인정을 받을 때, 관심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을 때, 즉 서로 같이 돌아볼 때 세워지고 자라게 된다. 놀라운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사람도 에스프레소 커피와 같다. 커피전문점에서 잘 팔리지 않아 메뉴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커피가 에스프레소다. 양도 적고 쓰기 때문에 몇몇 마니아를 제외한곤 거의 찾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에스프레소가 우유나 카라멜, 초콜릿, 계피, 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재료들과 만나면 커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다양한 재료들과 만날 때 진정한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에스프레소 커피다. 사람도 홀로 있을 땐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지만 누군가와 협력할 때 큰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에스프레소맨’(Espressoman)이라고 한다.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에스프레소맨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서로 같이 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 같이 돌아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돌보려는 사람이 복의 통로다.

정호승 시인의 〈내 등의 짐〉이란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르게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며 바르게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자기 한 몸 돌보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자기 코가 석자나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까지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의 표현처럼 무거운 짐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짐이 오히려 자신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심리학자는 ‘다른 사람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타인에 대한 관심의 결여다.’고 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뜻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사람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가 돌보려는 사람이 복의 통로인 것을 알아야 한다. 나를 잘되게 하고,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다. 주님을 보게 하고, 주님을 만나게 하고, 주님의 복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서로 같이 돌아본다는 것은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기쁨이 되고, 복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알기에 무거운 짐을 소중한 선물이라고 한 것이다. 부모는 열 자녀를 거뜬히 잘 돌보지만 열 자녀는 한 부모도 잘 돌보지 못한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부모는 자녀를 선물로 생각하고 자녀는 부모를 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돌보려는 사람이 소중한 선물이다. 이것이 서로 같이 돌아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다.

 

눈아, 수고했다! 발아, 고맙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훈련 프로그램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일과가 끝난 후 자기 몸의 각 부위에 안마를 해주면서 말로 칭찬하는 것이다. ‘눈아, 오늘 이것저것 보느라 수고 많았다.’ ‘코야, 콧물이 자꾸 나와서 괴로웠을 텐데 숨 쉬고 냄새 맡느라 수고 많았다.’ ‘발아, 여기저기로 갈 때 걷고 뛰고 계단 오르내리느라 고생 많았다. 네가 있어서 고맙다.’ ‘손아, 종일 운전하느라 수고했다. 네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붙잡아주고 끌어주고 일으켜줄 수 있었다. 고맙다.’ 이렇게 몸의 각 부위마다 칭찬을 하면 자신에 대한 소중한 마음이 자라난다고 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이런 훈련을 한다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욱 자라고, 신뢰가 더욱 깊어지고, 교제가 더욱 풍성해지리라 여겨진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지체를 사랑한다면 지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자랑스럽다고 서로 고백하자.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며 칭찬하고 격려할 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교회와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리라 확신한다. 바로 이런 것이 서로 돌아보는 일이다. 이런 돌아봄이 지체들을 굳건히 세워주고 바르게 자라게 하는 비결이고, 또한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하나되게 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잘되게 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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