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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습니다. ‘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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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364회 작성일 14-01-0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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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습니다. ‘心通’

엡4:32

2014. 1/5. 08:00, 11:00(신년, 개당기념주일)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다.

도종환 시인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이, 그리고 우리 교회와 지체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말없이 마음이 통하고

그래서

말없이 서로의 일을 챙겨서 도와주고

그래서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주지만

바람을 막아주고는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서 있는 나무처럼

늘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이 많아서 산 그림자를 깊게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을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과 물이 억지로 섞여 있으려 하지 않고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거기 있지만

그래서

서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듯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노래하고 있는 시다. 가정이나 교회, 사회에서의 모든 관계가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금년 한해 최소한 우리 교회에서만이라도 이런 관계를 기대해 보고 싶다. 우선 ‘말없이 마음이 통(心通)’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말없이 마음이 통하고, 그래서 말없이 서로의 일을 챙겨서 도와주고, 그래서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의 모습이다.

 

通卽不痛, 不通卽痛

요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super-key)는 ‘소통’(疏通)이다. 이는 소통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동시에 요즈음 우리 사회가 잘 통하지 않는 불통의 사회란 것을 반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현 정부를 ‘실용정부 6년차’라, 박근혜 대통령을 ‘말이 안통하네트’라고 부른다. 이것은 빵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 라고 말해서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질렀다는 마리 앙뜨와네뜨 왕비를 패러디한 것이다. 불통은 만병의 원인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막히지 않으면 아프지 않고, 막히면 아프다.’(通卽不痛, 不通卽痛)고 했다. 몸속을 흐르는 모든 것이 막힘없이 잘 통해야 몸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양의학도 ‘모든 병은 근본적으로 정체(停滯)이며, 모든 치료는 근본적으로 순환(循環)이다.’고 했다. 동서양 모두 건강의 원인을 소통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건강문제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관계, 나아가서 신앙생활에도 해당되는 문제다.

 

인구보건복지협회에서 기혼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부부 10쌍 중 4쌍이 하루 평균 대화시간이 30분이하였고, 이 중에 1쌍은 아예 묵언수행(黙言修行) 중이라는 어두운 통계가 나왔다. 이런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황혼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부부간의 불통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부부가 서로 통하지 못하니까 막히게 되고, 막히니까 관계가 병들게 된 것이다. 부부사랑의 묘약(妙藥)이 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수시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통해 소통이 이뤄지고, 건강한 부부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먼저는 하나님과 통하고, 또한 지체들과 통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소통은 당연한 것이고, 특히 지체들 사이의 소통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 ‘말없이 마음이 통(心通)하는’ 사이, 그래서 서로 말없이 챙겨서 도와주고,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유쾌(joy), 상쾌(refreshing), 통쾌(satisfaction)한 행복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말없이 마음이 통한 사람

본문은 간단하지만 신자 사이의 말없이 마음이 통(心通)하는 삶, 그래서 서로 말없이 챙겨서 도와주고,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는 그런 삶에 대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서로 친절하게 하며

어떤 여학생이 친구 소개로 남자를 만났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초콜릿도 주고 의자도 빼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남자의 행동이 느끼하기만 했다. 어느 날 6층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밖으로 나왔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커피 생각이 났다. 커피판매기는 1층과 6층에만 있었는데, 6층 판매기가 고장이 나 있었다. 1층까지 내려가기 귀찮아서 다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그 남자가 쏜살같이 1층으로 뛰어 내려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올라왔다. 하도 빨리 뛴 탓에 커피가 쏟아져 손목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네게 뜨거운 커피를 주려고 뛰다가 많이 흘렸어. 그럴 줄 알고 두 잔을 뽑았지. 두 잔을 합치면 한 잔은 될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두 가지를 할 수 없었다. ①더 이상 그를 싫어할 수 없었고, ②두 잔을 합쳐 한 잔으로 만들어 자기 혼자 마실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되었고,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친절이다. 친절을 헬라어로 ‘크레스토스’(χρηστος)라고 한다. ‘너그러움’이란 뜻이다. 친절은 상대방의 태도에 너그럽게 반응하는 것이다. 친절의 모범과 모델은 우리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제자들 역시 주님의 이런 모범을 따라 살았다. 그래서 친절에는 얼어붙은 마음도 녹이는 힘이 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서 서로 통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친절을 ‘귀먹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눈 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언어’라고 했다. 눈이 없고, 귀가 없어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 즉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를 열리게 하는 것이 친절이란 뜻이다.

 

2. 서로 불쌍히 여기며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함께 고통을 나눈다.’(compassion)는 뜻이다.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공감’(共感)이라고 한다.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자신의 처지로 생각하여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공감의 어원에는 ‘남의 신을 신고 걸어본다.’는 뜻이 있다. 그러니 남의 신을 신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신을 벗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쓴 뿌리의 신, 탐욕의 신, 분노의 신, 미움의 신, 편견의 신, 불신의 신, 비난의 신 등을 벗어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의 생각(易地思之), 그의 느낌(易地感之), 그의 필요(易地食之), 그의 살아온 삶(易地足之)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이것이 ‘易地四之’ 소통법). 이것이 공감이다.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가신 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공감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비결이다. 그리고 마음을 얻어놓으면 말이 없어도 마음이 통하게 된다.

 

3. 서로 용서하라.

여기에 나온 용서란 단어는 헬라어로 ‘카리조마이’(χαριζομαι)다. 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αρις)에서 나온 단어로 ‘은혜를 베풀다.’, ‘값없이 주다.’, ‘선물하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것이 은혜이지만 특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은혜, 아무런 대가도 없이 거저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 단어를 그냥 용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이 용서의 축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은혜,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위대한 선물은 ‘용서’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미움은 미워하는 그 사람 앞에 벽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벽을 쌓고 있는지 모른다. 때문에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또 같은 집에서 같이 잠을 자고 함께 생활하면서도 도무지 그 마음이 통하지 않고, 그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벽이 너무 높이, 그리고 너무 단단하게 쌓여있기 때문이다. 이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그 간격을 좁히고, 그 벽을 무너뜨린다. 용서는 바로 그 사랑의 꽃이고, 완성이다. 그러므로 말없이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원리는 용서다.

 

心心相印(심심상인)

마치 자기 자신처럼 말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뜻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이를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고 한다. ‘마음과 마음에 서로 새긴다.’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종자기(鍾子期)란 친구가 있었다. 그는 백아의 음악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그는 ‘참으로 태산처럼 웅장하구나!’고 말했고, 큰 강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어김없이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는 구나!’고 말했다. 소리만 듣고도 지금 백아가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알았다. 같은 하나님, 같은 주님, 같은 성령님을 믿는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신을 신고 걸어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에 장벽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그럽게 상대방을 품고, 나를 내려놓고 그 사람이 되어주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로 용서하자. 바로 여기에 서로 말없이 마음이 통(心通)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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