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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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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610회 작성일 13-11-2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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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 ‘모세’

민12:1~10

2013. 11/24. 08:00, 11:00

히말라야 삼목

캐나다 퀘벡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이 있는데, 산맥의 서쪽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만 동쪽은 히말라야 삼목 한 종류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대해 학자들이 많은 궁금증을 가졌다. 그렇지만 누구도 만족할 만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퀘벡을 여행하던 한 부부가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1983년 어느 겨울, 부부생활이 위태로워진 이 부부는 관계회복을 위해 여행을 했다. 그래도 안되면 이혼할 계획이었다. 소위 이별여행을 한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침 큰 눈이 내렸다. 그들은 동쪽 기슭에 있는 히말라야 삼목 위에 눈이 두텁게 쌓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눈이 쌓이자 나뭇가지가 아래로 구부러졌고 쌓였던 눈도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나뭇가지가 꺾이지 않고 여전했다. 이 광경을 보고 아내가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왜 동쪽에는 히말라야 삼목 외에는 살 수 없었는지. 동쪽은 눈이 많고 바람이 거세서 휘어질 줄 모르는 나무는 결국 꺾여서 죽고, 서쪽은 눈이 적고 바람이 많지 않으니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살 수 있는 거구요. 그런데 히말라야 삼목은 적당히 휘어지기 때문에 동쪽에서도 살아남은 거예요.’ 남편도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그 동안 나는 내 고집만 부리느라 당신 의견을 받아들이지도 양보할 줄도 몰랐소. 내가 구부릴 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던 것 같소. 미안하오.’ 아내 또한 구부릴 줄 모르고 살았던 자신을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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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수많은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양보하고 물러서지 못한다면 어떤 관계도 지속되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만 양보하고 구부리면 평안도 찾아오고 관계도 회복이 된다. ‘영광스러운 길은 좁지만 한 발만 물러서면 한 발만큼 넓어진다.’고 했다(명나라 학자 홍지성). 모세가 40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불순종과 반역,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백성을 성공적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여기에 있다. 양보와 구부릴 줄 아는 유연한 태도 때문이다. 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백성들이 거칠게 항의하거나 심지어는 반역하여 자신을 대적할 때도 그들과 ①맞서지 않고 그들을 ②떠나 하나님 앞에 ③엎드렸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세야말로 히말라야 삼목과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거친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는 영적 거목이 된 것이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

본문은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1)을 두고 일어난 사건이다. 겉으론 가족 사이의 갈등처럼 보이지만 모세의 지도력(모세의 자리)을 시기하여 일어난 매우 심각한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4,5) 모세를 변호하시고(6~8), 주모자 중에 하나인 미리암에게 진노하여 나병이 걸리게 하고(10), 진 밖으로 쫓아내 7일 동안 격리시켰고(14), 백성들도 7일 동안 그곳에 머물며 행진을 못하도록 했다(15).

 

이 사건이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것은 그 주모자가 모세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야 할 가족인 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가족이란 삶의 울타리와 같고, 버팀목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인생의 폭풍우를 막아주고, 버틸 수 있도록 붙들어주는 존재다. 그런데 누나와 형이 그를 비방을 하고 나선 것은 삶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버팀목이 사라진 것과 같다. 그들이 이렇게 그를 비방하면서 대적한 것은 그의 지도력(자리)에 대한 ‘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 우리도 모세 못지않다는 뜻이다. 모세만큼 기도, 모세만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세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모세만큼 열정이 있고, 모세만큼 영성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미리암은 선지자였고, 아론은 대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왜 모세 혼자서 좌지우지하느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가 결혼을 빌미로 비방하면서 대적하게 만든 것이다. 우린 여기서 시기의 악마성을 볼 수 있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잘살고 있는데, 출신(구스=미디안/ 십보라 미디안 출신)이 다르고 피부색(구스=검은)이 다르다하여 그것을 트집을 잡은 것이다. 시기에 사로잡히니까 자신들의 동생인데도 사실을 왜곡해서 악의적으로 나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기의 특징이다. 시기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고, 사실을 왜곡시켜 상대방을 나쁘고 보고 나쁘게 평가하고 나쁘게 말하게 한다. 이렇게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악의적으로 나쁘게 말하는 것이 비방이다.

 

비방하지 말자!

사람을 총과 칼로만 상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다. 말로도 얼마든지 상처를 주고, 병들게 하고, 나아가서 죽일 수 있다. 비방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비방을 ‘언어적 살인’이라고 한다. 성경도 비방을 ‘찌르는 칼’(시42:10)에 비유하고 있다. 어떤 의사는 암환자 대부분이 1~2년 사이에 비방의 화살을 맞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탈무드는 비방을 살인보다 더 위험하다고 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죽이지만 비방은 최소한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비방하는 본인을 비롯해서 비방의 대상, 비방을 듣고 있는 사람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비방의 특징이다.

 

어떤 형태로든지 남에게 상처 주는 비방을 금해야 한다. 비방은 사단의 주특기이고, 신자와 신앙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전략적 무기이다. 그러니 비방하는 사람은 신자를 향해 휘두르는 사단의 칼이 되고, 쏘아대는 사단의 화살이 되는 것이다.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폭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비방하는 순간 사단의 하수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본문을 통해서도 비방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에 대해 비방하는 말을 들으셨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조심해야 한다. 주님은 다 듣고, 다 보고 계신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94:9).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소환해서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8)고 책망하셨다. 그리고는 미리암을 나병으로 치셨다(9).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나병으로 치신 것은 비방을 이토록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특히 모세를 비방한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모세의 반응

한 여자가 카네기(D.B.Carnegie)에게 참을 수 없는 욕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카네기는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자네, 이런 말을 듣고도 참을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네. 비결이 뭔가?’ 그러자 카네기가 대답했다. ‘이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네.’ 잘 훈련되지 않고는 이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갖기 어렵다.

 

본문에서 모세 역시 카네기처럼 누나와 형의 비방에 대해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가 대응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 모세의 결혼에 문제가 있었다면 본문은 그들의 말을 ‘비방’이라 하지 않고 ‘비난’이라고 했을 것이다. 비난과 비방은 다르다. 비난은 꼬투리를 잡아 나쁘게 말하는 것이고, 비방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악의적으로 나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 비방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과 관계가 없는 그저 시기에서 비롯된 악의적인 것이라는 뜻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참고 인내했다. 단지 그가 반응을 보인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미리암이 나병에 걸리고, 아론이 기도를 요청했을 때다(11,12).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주옵소서.”(13). 그들의 비방에는 한 마디도 반응하지 않더니 그들의 요청에는 즉각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이를 보면 그는 정말 쓸개도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 앞에서 보여준 그의 일관된 모습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변명에는 빨라도 다른 사람을 돕는 데는 무딘데, 그는 비방에 대해선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더니 남을 돕는 일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것을 성숙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모습을 두고 본문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3)고 평가한 것 같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

물과 불이 우리의 삶과 생활에 얼마나 유익한가? 특히 잘 다스려진 물과 불은 우리의 삶에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을 준다. 하지만 다스려지지 않는 물이나 불은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최근 일어난 필리핀 타클로반 지역의 태풍이 좋은 예다. 무엇이든지 길들여지지 않으면 사용하기 불편하고, 서툴고, 힘들고, 위험하다. 그러나 길이 들면 편하고, 쉽고, 자연스럽고, 유익하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온유에 대해서 몇 번 설교를 했는데, 온유란 성품이나 성격이 아니라 잘 ‘길들여진’ 삶의 자세(태도)이다. 격언에 ‘화를 낼 줄 모르는 것은 바보이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온유의 특징을 잘 표현한 말이다. 헬라어로 온유를 ‘프라우스’(πραυ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잘 훈련되고 길이 잘 들여진 가축’을 뜻한다. 자기 고집을 꺾고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가축을 온유하다고 한다. 성경에서 온유하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스리고 통제하시도록 ‘내어 맡긴 삶’, 즉 ‘하나님을 향하여 길들여진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길이 든다는 것은 ‘익숙해진다는 것’, ‘물이 든다.’는 뜻이다. 즉 주님께 익숙해지고, 주님께 물든 삶이 온유다.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길이 잘 들여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가 이렇게 길이 잘 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스러운 사람’이 된 것이다(7). 또한 환경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히말라야 삼목처럼 유연한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의 광야를 허락하시고, 시험의 강을 건너고, 고난의 풀무를 지나게 하신 것은 우리를 길들이는 과정이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냈고, 야곱은 20년, 요셉은 13년, 바울은 12년의 인생의 광야를 경험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모쪼록 우리 모두 주님께 잘 길들여져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데 익숙한 인생, 나아가서 주님으로 물 든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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