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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선물,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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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374회 작성일 13-12-2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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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선물, “성탄”

사40:1~5

2013. 12/25. 11:00(성탄절)

위로가 필요한 세상

 1978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취임한지 33일 만에 서거했다. 그의 죽음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장례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황이 짧은 임기동안, 특히 임종직전에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를 기억해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일기문이 공개되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위원회였다. 그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인도 빈민가에서 평생을 바친 마더 테레사에게 평화상을 수여하였다. 원래는 중동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고한 카터 대통령에게 주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을 돌려서 테레사에게 수여한 것이다. 테레사 수녀의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빵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직장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다. 하지만 빵보다 집보다 직장보다 건강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작은 관심, 작은 위로, 작은 사랑이다. 이것이 없기에 세상은 밝아졌는데 어둠은 짙어가고, 사람들의 삶은 풍요로워졌는데 양극화는 심화되고,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가 불행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도,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이 세상이 온통 사막화 되고 있는 것이다. 오스텅스 블루의 「사막」이란 시에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군중 속에 살고 있지만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발자국이라도 보면 위로가 될까싶어 뒷걸음질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이나 테레사 수녀가 그래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위로하고 사랑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사막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고, 주변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비결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런 세상,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기쁜 소식이다.

 

위대한 위로는 ‘용서’다.

이사야서를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성경이 모두 66권인 것처럼 이사야서도 66장이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두 부분으로 나눠진 것처럼, 이사야서도 1장~39장까지 39장과 40장~66장까지 27장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전반부는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고, 후반부는 ‘회복의’ 말씀이다. 본문은 후반부 전체의 서론에 해당된다. 그리고 1절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은 후반부 전체의 주제이다. 이스라엘이 범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할 것(1:~39:)이지만 반드시 회복되리라(40:~66:)는 위로의 말씀이다. 이러한 위로의 말씀이 곧 40장에서 66장까지의 주제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고,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는 분”(호6:1)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하고,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물론 배고픈 사람에겐 빵이 위로가 되고, 집에 없는 사람에겐 집이 위로가 되고, 직장이 없는 사람에겐 직장이 위로가 되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겐 건강이 위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참된 위로가 될 수 없다. 참된 위로는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은 ‘사죄’이다. 죄를 사함 받는 것, 곧 ‘용서’이다. 용서는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위대한 위로다. 그래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외치라고 말씀한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2).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 용서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 말로 위로하라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단편 모음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에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과 사사건건에서 충돌하였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볼 때, 아들이 하는 일마다 못마땅했다. 계속 충돌한 나머지 아들이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몇 해 동안 소식이 끊겼다. 그렇게 나간 아들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아버지는 괴로웠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망도 없고, 사람답지 못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그 아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못 났고, 못 되었고, 소망도 없고, 사람답지 못해도 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 짤막하게 ‘파코!’, 아들의 이름이 파코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광장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이렇게 신문에 광고를 냈다. 예정한 날 정오에 호텔로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파코가 흔한 이름이라서 파코라는 이름으로 집나간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 것이다.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용서했다.’는 이 한마디에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이 용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사람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 이것이 복음이다. 사랑이다. 가장 위대한 위로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위로의 선물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증거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이것이 성탄절이고, 성탄의 의미다. 주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고, 가장 낮고 천한 곳, 더러운 짐승의 우리로 오신 이유다. 세상에서 더러운 벌레처럼 취급을 받는 낮고 천한 우리의 위로자가 되고,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다.

 

용서를 받는 그릇, ‘믿음’

만약 파코라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 광고를 보고, ‘웃기지 마세요!’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이 노인네 말을 어떻게 믿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니 아버지의 용서 선언만큼 중요한 것이 아들의 반응이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아들의 마음이다. 집을 나와 아버지와 관계를 끊고 사는 아들 역시 괴로웠을 것이다.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은 ‘다 용서했다.’는 아버지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에 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선포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예비(豫備)하라고 말씀하신다(3~4).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산은 낮아져야 되고, 골짜기는 돋아져야 되며, 고르지 않는 곳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 ‘산, 골짜기, 고르지 않는 곳, 험한 곳’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용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려면 낮아져야 된다. 자기 의를 주장하고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여기는 교만,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교만을 꺾어야한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낮아져야 된다. 철저하게 겸손해야 된다. 그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된다. 나 같은 것은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높아져야 한다. 아버지가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면 나는 아들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면 나는 딸이다. 내 천한 신분, 더러워진 과거, 씻을 수 없는 추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된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르지 않는 곳을 평탄하게 해야 한다. 굽어진 마음, 갈고리 같은 마음, 편견, 오해, 이런 것 다 버리고 순진한 마음, 깨끗한 마음, 정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로 이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는 이 복음을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본문은 용서의 복음을 수용할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복음의 씨가 뿌려졌지만 결실은 ‘좋은 땅’(玉土)밖에 없었다(마13:1~11). 아무리 귀한 선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이와 같은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그릇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교만한 마음이 겸손해지고, 여러 가지 상처로 찢기고 상한 마음이 회복되고, 굽은 마음 갈고리처럼 꼬인 마음이 펴지게 된다. 그래서 용서를 받아들이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누리게 된다.

 

꼭 해야 할 말, 가장 듣고 싶은 말

어느 중년남자가 일주일동안 해외출장을 갔다. 갈 때 생각은 아침저녁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해서 ‘잘 도착했어!’ 한마디 해놓고는 이래저래 바빠서 그만 전화를 못했다. 그런데 당장 내일 돌아가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면서 생각했다.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어. 사랑해!’ 이렇게 말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전화를 받자 하는 말이 ‘집에 아무 일 없어? 애들은 잘 있고? 강아지는? 난초에 물은 줬지?’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가 울먹이면서 ‘당신, 해도 너무해!’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남편의 문제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이다. 애들도, 강아지도, 화초까지 챙기면서 가장 중요한 아내는 챙기지 않은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중년남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만 하는 이 남편의 모습이 오늘 우리 교회와 신자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도 가장 중요한 말을 빠뜨리고 있다. 그것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위로의 명령이다. 즉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용서의 복음을 빠뜨린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등대가 되지 못한 이유이고, 신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한 이유다.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 역시 이 용서의 복음이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해결하셨다는 이 복음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이것이 성탄절이다. 복음 안에 사랑이 있고, 위로가 있고, 회복이 있고, 치유가 있고, 축복이 있다. 이것이 우리 신자와 교회가 꼭 해야 할 가장 귀한 말이다. 세상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귀한 것을 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성탄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그리고 이 복을 주변과 풍성히 나누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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