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설득,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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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858회 작성일 13-09-29 14:51본문
하나님의 설득, ‘모세’
출 4:1~9
2013. 9/29. 08:00, 11:00
소명과 사명
소명과 사명은 다르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 그 자체이고, 사명은 그 부르심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소명감이란 내가 주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뜻하고, 사명감은 주님께서 내게 ‘이것을 하라’ 명하셨다고 깨닫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소명과 함께 사명이 주어진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모세의 경우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3:4) 하고 부르신 후, 이어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고 사명을 주셨다.
또한 소명을 받을 때와 사명을 받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다. 소명은 주님의 놀라운 임재와 함께 주어지기 때문에 큰 은혜와 감격스러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응답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니 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4)하고 응답했다. 그런데 사명을 받을 때는 다르다. 물론 이사야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처럼 ‘즉각’ 반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레미야처럼 당황하여 망설이거나 요나처럼 피하여 도망을 가기도 하고, 모세처럼 강하게 거절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왜 소명에는 감격스럽게 반응하면서 사명에는 즉시 응답하지 못한 것일까? 사명을 받고 즉시 ‘아멘으로’ 응답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 자기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대로 이런 일을 맡겨주시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형태로 사명이 주어질 때 쉽게 응답하지 못한다.
둘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나가 그랬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민족의 원수인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세상 끝으로 여겼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한 것이다.
셋째, 자신이 부족하여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능력도 없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고, 또한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 때문에 주저하거나 거절한 것이다. 사사 기드온(삿6:15)과 선지자 예레미야(렘1:6), 그리고 모세가 그랬다.
하나님의 설득
그런데 주님은 사명에 당장 응답하지 않는다고 그 사명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그가 기꺼이 순종하거나 항복할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설득하신다. 어떤 경우는 선지자 요나처럼 커다란 시련을 통하여 설득하시기도 하신다. 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설득’이라고 표현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거절한 모세를 집요하게 설득하시는 장면이다. 이런 하나님의 설득은 3장 12절부터 시작되었다.
말씀으로 설득하신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이제 가라, 바로에게 가서 학대받고 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라.’(3:9,10)는 말씀에 대하여 당장 거절하였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한마디로 자신은 그 사명을 감당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내가 누구이기에”)는 뜻이다.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바로 앞에 설 자신을 내대보면서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그대로 토로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그에게 하나님께서 설득을 하셨다. 우선 ‘말씀’으로 설득을 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12)는 ‘임마누엘 약속’을 하셨다. 이는 그의 부족과 무능을 채워주시겠다는 신적 보증이다. 그러니 자격이 없다 능력이 없다고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설득은 12절 이하에서 계속된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1)고 말했다. 앞에서(3:11)는 자격없는 자신을 내세워 거절했는데 여기서는 백성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르지도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표징으로 설득하신 하나님
모세의 거절에도 타당한 점이 있다. 그 동안 그토록 학대를 당하고, 고역에 시달려도 하나님께서 침묵만 하셨는데, 느닷없이 그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여러분을 구하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말한다면 선뜻 믿고 따르겠는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약속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한 것이다. 이 일은 자신의 확신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 그리고 순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40년 전에 그가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확신과 자신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가 학대하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을 때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며 따를 것으로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5). 이런 그의 행동에 모든 백성이 일어나 그를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행7:27)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그가 광야로 들어가 정처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도 확신을 갖고, 백성들도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기적’으로 설득을 하셨다. 하나님은 세 가지 기적을 주셨는데, 두 가지는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셨고, 하나는 다음에 백성들에게 보이도록 했다. 첫 번째 기적은 지팡이 표적이다(3,4). 그의 손에는 광야 40년을 함께 했던 목자의 지팡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땅에 던지자 뱀이 되었고, 그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된 사건이다. 둘째는 손 기적이다(6,7).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되었다.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사건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일 강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기적이다(9).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사건들이 내용상으로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이기 때문에 ‘기적’(miracle)인데, 본문은 이를 ‘이적’ 혹은 ‘표적’(sign)이라고 한 점이다. 기적과 표적은 차이가 있다. 기적은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이 있고, 표적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 기적사건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의 표징(sign)으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5).
이것이 표적을 주신 목적이다. 즉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힌 모세에게 임마누엘 약속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고,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시고, 천형으로 여기고 있는 나병을 생기게도 하시고 낳게도 하시며, 나일 강 물을 피가 되게 하시는 능력자시라는 것,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부족과 무능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이 표적들로 보증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시며 주님의 사명을 받은 사역자인 것을 확신하게 하고,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해준 것이 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표적을 세 가지나 보여주셨다. 숫자 3은 완전수로, 이는 그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강조한 것이다.
사랑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신의 언변이 능하지 못함을 들어 또 다시 거절했고(10), 이에 대해 하나님은 말 잘하는 그의 형 아론을 동역자로 세워주시겠다(14)고 설득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거절하는 모세에게 끊임없이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참고 기다리면서 계속 모세를 설득하신 것은 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킬 수가 없어서 계속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설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에게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어서 참고 기다리며 설득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탄생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참고 기다리며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또한 참고 기다리며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두드린다.’는 말은 문을 열도록 설득한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 두드린다(설득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설득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출애굽기에 하나님의 설득 앞에 선 대표적인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모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집트 왕 바로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설득에 순종으로 응답하여 하나님께 쓰임받는 복된 인생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는 그 설득을 끝까지 외면하다가 망했다. 본문은 모세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이와 같은 주님의 설득에 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끊임없는 설득에 항복하는 것이다. 인생의 복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설득을 당하는 것은 수치가 될 수도 있지만 주님께 설득을 당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복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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