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게 하는 사람, ‘보디발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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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63회 작성일 13-08-11 12:54본문
넘어지게 하는 사람, ‘보디발의 아내’
창39:7~18
2013. 8/11. 08:00, 11:00
욕망은 끝이 없다!
중국 당나라 때 현종과 안록산, 그리고 양귀비가 한자리에 앉아서 진실게임을 했다고 한다. 안록산이 황제에게 물었다. ‘천하가 폐하 것인데 폐하는 여기에서 더 바라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천하가 비록 모두 내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내게 가져오는 사람은 선하게 보이고 뭐든 달라고 하면 괘심하게 보인다.’ 양귀비가 안록산에게 물었다. ‘당신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천하권세를 다 부리고 있는데, 그래도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안록산이 대답했다. ‘지금 내가 천하권세를 다 부리고 있지만 그래도 내 위에 있는 한 사람이 거슬립니다.’ 황제가 양귀비에게 물었다. ‘그대는 받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누리고 사는데 그래도 아쉬운 것이 있는가?’ 양귀비가 대답했다. ‘폐하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니 아쉬울 것이 없을 듯도 하지만 그래도 젊은 장수를 보면 한 번 안아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욕망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재미난 일화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물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욕망’, 육체에 대한 ‘정욕’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禍莫大於不知足
많은 사람들이 (황제처럼)‘가지지’ 못하고, (안록산처럼)‘부리지’ 못하고, (양귀비처럼)‘누리지’ 못한 것을 불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큰 불행은 만족을 모르는 것이다(禍莫大於不知足). 행복이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나 권력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 만족을 아는 사람에게 스스로 찾아온다. 또한 만족을 모르는 것이 병 중 가장 큰 병이다(病莫大於不知足). 그 어떤 약이나 의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이다. 그런데 세상은 ‘만족’보다는 ‘부족’에 대한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정말 부족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가지고 있고 부리고 있고 누리고 있지만 만족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소위 ‘부지족’(不知足)병에 걸린 것이다.
본문에도 이와 같은 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세계 초(超)강대국 이집트에서 부와 권력과 명예의 중심부에 있던 보디발이란 사람의 아내다. 그녀는 바로의 시위대장이라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부와 권력과 명예를 한 몸에 누리며 살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할 것이 없는, 모두의 부러움을 살만 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그녀가 가지지 못한 한 가지 때문이다. 그 한 가지가 남편이 데리고 온 노예, 히브리인 청년 ‘요셉’이다. 그녀는 요셉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모’(6)에 강한 욕정(欲情)을 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안주인으로서의 체면이나 체통 따윈 모두 내려놓고 요셉을 유혹하였다. 하지만 요셉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로 이 한 가지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아니 이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구든지 없는 것에 집중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그 없는 것을 대신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 하나 때문에 불평하게 된다. 그러면 반드시 그곳에 불행이 찾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게 하려면 현재 내게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이 찾아오게 된다. 본문은 한 귀부인(보디발의 아내)이 정욕을 때문 비참하게 망가진 모습과 함께 정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도구화, 정욕.
한 남자가 혹은 한 여자가 이성(異姓)에 대하여 사랑의 감정을 갖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정욕은 사랑으로 포장되지만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은 지속성과 헌신을 동반하지만 정욕은 순간의 만족을 추구한다. 사랑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서로 절제하고 서로 세워가지만 정욕은 오직 현재 자기만족, 자신의 쾌락에만 관심을 갖고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파괴시킨다. 또한 정욕은 비인격적이고 일방적이다. 그러나 사랑은 인격이고, 인격적인 교감이다. 상대방에 대한 친절과 호의, 배려이다. 이런 따뜻함 속에서 사랑은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주는 것,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욕은 빼앗는 것이다. 힘으로 빼앗고, 돈으로 빼앗고, 권력으로 빼앗고, 여러 가지로 유혹하여 빼앗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고, 짓밟고, 무너뜨린다. 이는 상대방을 인격적인 대상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욕의 본질이다. 그래서 4세기 사막수도사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는 정욕을 ‘잔인한 죄’라고 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도구화!’ 이것이 정욕이다. 성범죄를 종교는 물론 사회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다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인격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패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것은 인격살인이다. 이것이 정욕의 특징이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정욕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보디발의 아내가 ①은밀하게(7절 “눈짓하다가”), ②끈질기고 집요하게(10절 “날마다”), 그리고 ③적극적으로(12절 “그의 옷을 잡고”) 유혹하며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하고 있지만 요셉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녀에게 요셉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현재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이용의 대상(도구)일 뿐이다.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요셉을 유혹한 것이다. 유혹에 실패하자 이런 속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유혹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이러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14,15).
이는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요셉을 이용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드러낸 일종의 분풀이고 보복인 샘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한다. 정욕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자신을 반성하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요셉에게, 더 나아가서 그를 집안으로 데리고 온 자기 남편에게 떠넘기는 뻔뻔함과 파렴치함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의 출신(“히브리 사람”)을 들먹이며 민족감정(“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까지 부추기는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4절에서 그녀가 ‘우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서 연대의식을 끌어내기 위한 술책이다. 이 또한 노예들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사람취급도 않던 그녀가 그들에게 ‘우리’라고 한 것은 그들을 이용하기 위한 정략적인 술어에 지나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속는다. 아니 속아 준다. 자신도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심으로 가득찬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존재방식이다.
도구화에 용기있게 맞선 요셉
요셉의 위대한 점은,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목숨을 걸고 자신을 이용하려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용기있게 맞선 것이다. 사실 요셉에게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응해도 죽음이고 거절해도 죽음이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요셉은 ‘이용가치’가 있는 도구일 뿐이다.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6). 이 때문에 유혹의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도구는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버린다. 설령 요셉이 그녀의 요구에 응했더라도 이렇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요셉을 결코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기왕 죽을 것,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물건처럼 이용당하다가 버려지느니 인간으로서 죽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요셉의 탁월한 점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기를 각오했더니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주셨다(마16:25). 물론 이 때문에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고, 그의 인생에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총리요셉도 없었다. 설령 총리가 되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부양자’(사브낫바네아)가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처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용하지도 말고, 이용당하지도 말자!
보디발 아내의 모습은 사단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사단이 보디발의 아내를 이용하여 요셉을 이용하게 만든 것처럼, 우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의 존재를 무너뜨리고,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신앙생활에서도 신앙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이용도록 만든다(흔히 말하는 기복신앙, 번영신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도구화에 요셉처럼 목숨을 걸고 맞설 수 있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튼 사단에게 이용당해서도 안되지만 또한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도 안된다. 그러기 위해선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한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산다는 뜻이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공간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는 한 보디발의 아내처럼 부족감 속에서 허전하고, 외롭고, 공허하고, 허기진 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단의 통로가 되어 사단에게 이용당하게 되고, 그 부족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존재의 충만을 느끼기 때문에 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충만함 속에서 호흡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욕망과는 먼 삶을 살게 된다. 때문에 사단에게 이용당하지도 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게 된다. 이용해서 무너뜨리고 파괴시키는 도구화에 맞서는 것이 신자와 교회의 소극적인 사명이라면 세워주는 것, 구원하고 살리는 것은 신자와 교회의 적극적인 사명이다. 이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주님의 임재로 충만한 교회, 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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