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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아이,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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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09회 작성일 13-09-0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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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아이, ‘모세’

출2:1~10

2013. 9/1. 08:00, 11:00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려서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가끔 들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었는데, 나중엔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부모님이 섭섭하다고 여겨질 때면, ‘나를 주어 와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이 말이 생겨난 곳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 근처 ‘청다리’(옛 이름은 제월교)로, 여기에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된 세조 때,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아들)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동조했던 이 지역의 많은 선비들과 그 가족이 희생되었다(1457년 ‘정축지변’). 그 때 어렵사리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웠는데, 이 아이들을 ‘청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불렀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이곳에 서원이 세워지자 전국에서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자연히 인근 처녀들과 어울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사회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된 처녀들이 아기를 청다리 밑에 내다버렸다. 그러자 이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었다. 선비라면 최고의 신분이고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핏줄을 데려가 기르기 위해서다. 이렇게 해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선비정신을 비하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참 기구하고 서글픈 인생의 기원을 말해주고 있다.

 

본문에도 참 기구한 운명의 한 아이가 나온다. 바로 ‘모세’다(본문참조). 자기 자신이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은 원망스러운 투로 하나님을 향하여 외친다. ‘이럴 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우리의 사정을 아시기나 하신가? 왜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참으로 절박하면서도 가슴 아픈 외침이다. 이에 대해 영성작가 브레넌 매닝(B. Manning)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생여정의 가장 가슴 아픈 시간에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베일에 가려진 자상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시간입니다.’ 그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뜻이다. 지난 주일에도 언급했지만 모세의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이 시간에는 모세탄생과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빵’ 대신 ‘돌’을 던지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빵 대신 돌을 던져주실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돌에 맞아 실족하고, 어떤 사람은 그 돌을 기초삼아 멋진 인생의 집을 짓는다. 똑같은 돌인데 어떤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걸림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높이 비상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돌에게 대한 관점과 태도의 차이 때문이다. 내가 당하는 고난의 환경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꼭 만나야 할 사람, 꼭 깨달아야 할 내용, 꼭 해야 할 사명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 삶에 배열해 놓으신 환경이다. 날아온 돌을 이런 관점과 태도로 맞이한 사람은 그 돌로 멋진 인생의 집을 짓고, 높이 비상할 수 있는 디딤돌로 삼는다. 이를 돌(고난의 환경)에 대한 섭리적 관점, 혹은 섭리적 태도라 한다.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고난을 섭리적 관점에서 보면, 이 고난은 이집트가 그들이 머물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실 요셉시대부터 350년 이상을 터를 잡고 살았으니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고는 이집트 고센지역이 자신들이 영원히 거할 곳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통하여 자신들이 거할 곳은 이집트 고센지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요셉이 임종직전에 자신의 유골을 부탁했던 땅 가나안이란 사실을 깨닫고, 소망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난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게 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는 이런 극심한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다. 그리고 모세 역시 이런 고난을 통과하게 하셨다(3). 고난을 통과한 사람이라야 고난 받는 사람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비참한 생애를 보내시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다. 그래서 모세를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또한 예수님을 제2의 모세라고 부른 것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마야문명을 외부의 도전이 없어서 스스로 멸망한 문명이라.’고 평가했다. 마야는 기원전부터 중앙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찬란한 문명을 이뤘다. 그런데 이런 찬란한 문명이 900년경에 갑자기 무너졌다. 그 원인이 적이나 천재지변 등 외부요인 때문이 아니라 그저 태평스럽게 살다가 스스로 타락하여 무너졌다는 것이다. 물론 거친 폭풍우가 나무를 넘어뜨리기도 하지만 나무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다루심’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래야 붙잡고 있는 세상 줄을 놓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꺾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 인생의 혹독한 시련은 우리를 강한 주님의 용사로 만든다. 나아가서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섬기도록 한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신다.

성경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라’(애3:33)고 하였다. 단지 필요해서 허락하신 것이지 무너뜨릴 목적이 아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과 더불어 반드시 피할 길도 주신다(고전10:13). 하나님은 모세를 살리기 위해서 살인명령을 내린 이집트 왕(투트모세 1세)의 무남독녀(핫셉숫트)를 사용하셨다. 공주는 모세가 부왕이 죽이라고 명령한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명령을 어기고 그를 불쌍히 여겨(6)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다(10). 어떤 사람들은 공주가 너무 착하고 정이 많아서 모세를 거뒀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둔 곳으로 공주를 오게 하셨고,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이 아기를 보자 마음을 움직여 불쌍히 여기게 하셨고, 노예의 자식을 양아들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로의 살인명령으로부터 모세를 지키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악한 명령을 내렸던 바로의 딸에 의해 장차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구출을 받고, 그가 거하는 궁전에서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다. 사실 이집트 천지에서 모세의 생명을 보장하는데 공주보다 든든한 보호자가 어디 있고, 궁궐보다 안전한 장소는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마치 왕의 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친어머니의 품에서, 품삯을 주면서 기르도록 했다(9).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보다 강하다(고전1:25)고 바울이 증언한 복음의 역설성이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이렇게 외쳤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그러니 어떤 권력도 하나님의 섭리를 꺾을 수가 없고, 방해할 수 없다.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방해한 것을 이용하여 더 좋게 만들어 버리신다(롬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리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 형통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절망적인 환경을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우는 디딤돌이 되게 하시고, 그의 생명을 해하려 하는 사람을 든든한 보호자가 되게 하셨다.

 

모세, 그를 물에서 건져냈음이라.

또한 놀라운 것은 모세라는 그의 이름이다. 모세란 이름은 공주가 지어준 것이다(10). 단순히 모세를 구출했던 상황을 반영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모세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깨닫게 해주는 뜻이 있다.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의 모세는, 그가 물에 빠져서 죽게 된 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이름이다. 그를 이 죽음의 물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다. 모세라는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한 것이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되었으니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게 해주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물에서 건져주신 것처럼 그도 고통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통해 이와 같은 사명을 알게 한 것이다. 단순히 지어준 이름에 이런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있다. 훗날 모세는 자신의 이름대로 살았다. 그리고 모세라는 이 이름은 지금 우리의 존재와 사명을 깨닫게 해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 죄악의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 또한 물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시대의 모세인 것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단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아기 모세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모세는 극심한 고난의 환경에서 태어났고,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난의 돌은 민족의 구원자로 삼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 속에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공주가 단순히 지어준 그의 이름에까지도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였다.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나고 자란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섭리의 아이, 모세’라고 한 것이다. 이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 또한 섭리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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