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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차지할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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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1회 작성일 26-10-1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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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차지할 땅

잠28:22

2026. 10/18 11:00(성령강림 후 스물한 번째 주일)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의「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유명한 단편 소설이 있다. 이미 이 책을 읽었거나 내용을 들어 아는 분이 많을 것이다. 주인공은 평범한 농부 ‘파홈’(Пахом)인데, 그는 어느 날 어떤 지방(바시키르)에서 땅 주인이 땅을 헐값에 판다는 말을 들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땅 주인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땅 주인의 땅을 파는 방식이 독특했다.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 발로 밟고 돌아온 땅이 바로 자신의 땅이 된다는 것이다. 땅값은 일정한 데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하루 열심히 달리면 100만 평 정도는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이 계약에 동의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두 팔을 앞뒤로 힘차게 내저으며 달려 나갔다. 땅 부자가 되는 꿈에 활활 타오르며 걷다 보니 음식도 먹지 않은 채 구덩이를 파서 표시를 하며 계속 전진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반환점을 돌았어야 하는 시점이었지만 자기 앞에 있는 땅이 더 비옥하고 탐스럽게 보여서 멈추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결국 해가 지평선 아래로 숨어들 때에야 발걸음을 돌려 출발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간신히 출발점에 도착했지만,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죽고만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땅 주인은 그를 묻어주었다. 그렇게 파홈은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땅에 묻히게 되었고, 그의 무덤을 바라보며 땅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결국,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그가 묻힐 ‘반 평 남짓’의 땅이었던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파홈’의 이야기는 탐욕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를 아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처음부터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니었다. 만족할 줄 아는 소박한 농부였다. 하지만 땅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히면서 그의 눈은 점차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더 넓은 땅’으로 가득 찼다. 결국 이런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것이다. 본문 역시 물질을 향한 조급한 탐욕이 결국 무엇을 초래하는지 경고한다. ‘악한 눈이 있는 사람은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22).

 

악한 눈에 사로잡힌 우리

파홈의 이야기나 본문의 말씀은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오늘 우리에게도 무겁게 다가온다.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재물은 곧, 성공과 안전,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더 나아가 ‘신’(Mammon)이 되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어야 할 물질이, 삶의 목적 그 자체이자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물질은 인간의 존엄성, 도덕, 정의, 사랑, 명예 등 모든 무형의 가치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소위 ‘배금주의’(Mammonism)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경제적 집착을 넘어, 인간 본연의 깊은 영적 감수성과 도덕적 시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영적 눈멈’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 구별되기를 다짐하는 신앙인조차 이 물질만능주의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아이러니다. 즉, 교회 안에서 직분이나 헌금의 규모, 사회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나 영향력으로 오인되곤 한다. 거룩해야 할 성전의 문턱까지 자본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신/불신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더 많은 재물과 성공을 탐(貪)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중한 영적 시력을 잃어버린 ‘악한 눈’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악한 눈’은 고대 지중해 세계와 근동에서는 미신적 주술적인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특히 누군가 너무 큰 성공을 거두거나 아름다움, 부를 자랑하면 신들의 질투를 부르는 ‘악한 눈’에 명중되어 파멸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파란색 부적, 눈 모양의 장식, 주문 등을 통해 이 악한 시선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성경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이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악한 눈’의 개념을 철저히 도덕적·영적 차원으로 전환시켰다. 성경은 ‘악한 눈’을 남의 행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시기하고, 가난한 이웃을 인색하게 대하며, 탐욕을 품은 마음의 상태로 평가했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악한 눈을 버리고, 너그러운 마음(선한 눈)으로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할 것을 권한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본문의‘악한 눈’ 역시물질과 자기 이익만을 계산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보지 못하는 탐욕의 눈을 뜻한다. 톨스토이 단편에서 파홈의 눈이 여기에 속한다.

 

악한 눈의 처참한 결말

파홈은 하루 동안 자기 발로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듣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멀리 달려 나갔다. 멈추고 돌아 올 줄을 몰랐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악한 눈에 사로잡혀 자기 앞으로 펼쳐진 더 좋은 땅을 두고 멈추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만 조금만’계속 달리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욕심이 그의 눈을 왜곡시키고, 왜곡된 악한 눈이 그의 탐욕을 들끓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달렸던 땅을 단 한 평도 갖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가 죽어서 묻힌 땅도 그가 얻은 땅이 아니라, 땅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에게 제공한 것이다. 악한 눈의 결말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내 자신이다. 환경이나 어떤 세력이 아니다. 욕심에 사로잡힌 악한 눈이다.

 

본문은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을 향해 이렇게 경고한다.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재물을 얻기에만 급하여,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영적 파멸을 경고한 것이다. 여기서 ‘빈궁’은 단순히 경제적 가난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영적 파멸에 이르는 모든 것이다. 재물을 탐하고 타인을 착취하여 얻은 부(富)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철저한 ‘가난(마음과 관계의 고갈)-결핍(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파멸(자멸로 이어지는 종착역)’로 이어지게 된다. 물질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신 도구이다. 눈앞의 신기루 같은 재물에 시력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남을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과 악의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고통만 남기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악마의 통로로서 욕심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욕심을 가질수록 더 큰 대상을 원하게 만드는 증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의 덫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폭로한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이 소설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욕심이 인간을 무너뜨리는 ‘악마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악마는 칼이나 몽둥이로 파홈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넓은 땅을’이라는 작은 욕심의 씨앗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 욕심이 지나가는 길에 땅이라는 유혹을 슬며시 깔아놓았을 뿐이다. 파홈의 비극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라는 그의 혼잣말에서 시작된다. 이 말을 악마가 들었을 때, 이미 악마가 들어올 통로가 그의 마음에 열렸다.

 

물론 처음에는 가족과 소박하게 살 공간이면 족했던 마음이 한 마지기, 두 마지기 땅을 넓혀가면서 점차 만족은 사라지고 결핍과 갈증으로만 채워졌다. 그러다 결국 바시키르인의 들판에서 ‘저 언덕까지만, 저 골짜기까지만’하고 외치며 악마가 터놓은 욕심의 길을 따라 거침없이 달려가다 스스로의 숨을 갉아먹게 되었다. 욕심이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온 유혹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고, 더 큰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즉, 채울수록 허기진 마음을 갖게 만든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것, 나에게 주어진 삶의 두께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때 악마의 통로는 비로소 닫히게 된다. 결국 파홈이 숨을 거두며 누운 ‘반 평 남짓 땅’은, 욕심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 우리가 삶에서 진정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서늘할 만큼 명확하게 보여준다. ‘악한 눈이 있는 사람은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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