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문을 여는 거룩한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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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10-04 15:13본문
기도의 문을 여는 거룩한 귀
잠28:9
2026. 10/4 11:00(성령강림 후 열아홉 번째 주일)
들음이 없는 기도의 위험성
영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허버트 웰즈(H. G. Wells)의 단편 소설 「대주교의 죽음」에 나온 이야기다. 평생을 성직자로 살아가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던 한 대주교가 있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라고 기도를 늘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그 기도가 끝난 직후, 진짜 하늘로부터 놀라운 음성이 들려왔다. ‘오냐, 무슨 일이냐?’(Yes, what is it?).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직접, 그리고 즉각적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에 그는 큰 충격과 공포에 그만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는 일종의날카로운 풍자다. 대주교는 평생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께 평생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리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니 너무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일방적인 신앙의 위험성, 곧 기도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들음’(순종)과 ‘기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강력하게 경고하는 지혜의 말씀이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9). 여기서 ‘귀를 돌려’에서 ‘돌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시르’(מֵסִיר)는 ‘돌아서다.’, ‘외면하다.’, ‘거둬들이다.’라는 뜻의 ‘수르’(סוּר)의 사역형 분사다. 즉, 실수로 못 들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고 고개(귀)를 돌리는 적극적인 거부를 의미한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에서 ‘듣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솨마’(שָׁמַע)로 단순히 소리를 청각적으로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듣고 순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삶을 뜻한다.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에서 ‘가증하다.’라는 ‘토에바’(תּוֹעֵבָה)로, 우상 숭배나 극심한 도덕적 부패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다. 즉,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귀를 막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오히려 역겨운 위선(토에바)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기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한다. 좋은 대화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즉, 내가 말하기보다상대방의 입장에서 귀 기울여 주고, 말을 하도록 이끌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의 문이 열리고 비로소 깊은 대화가 이어진다. 기도도 그렇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께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들음이 없는 기도는 나 혼자 외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많은 성도가 기도를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아뢰는 시간’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기도에는 나의 간구가 포함된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쌍방향 소통’이다. 소통의 기본은 내가 말하기 전에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나님께 쏟아놓고 있는가?’
순종 없는 기도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성경에서 ‘듣다.’(שָׁמַע)라는 말에는 항상 ‘순종’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이 순종을 전제로 한 들음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순종이 없는 들음은 그저 지식을 채우는 ‘정보수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수준의 성도가 많다. 열심히 듣기는 듣는데, 듣고 순종해서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데 있지 않고, 정보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듣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듣고 알았으면 살아내야 하고, 들은 대로 살아냈을 때 비로소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듣고 깨닫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순종의 발걸음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기도가 완성된다. 순종없는 기도는하나님의 뜻에는 귀를 돌리고(מֵסִיר אֹזֶן) 자기 뜻만 고집하는 기도다.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이용하는 행위다. 그저 기도라는 형식으로 포장된 ‘자기만족’이다. 본문은 이러한 기도를 가리켜 ‘가증하다.’(תּוֹעֵבָה)라고 단언한다. 내가 바로 그 가증한 기도의 주인공이 아닌지 심심히 돌아보기 바란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회개에 있다. 그리고 타인을 위한 중보에 있다. 그러나 자기만족의 기도는 자신의 종교적 업적, 도덕적 우월감, 혹은 심리적 위인을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취하는 태도를 말한다. 즉,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라, ‘자아의 확장(과시)과 위안(자기 만족)’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영적 교만으로 이어진다. 사실 기도를 많이 하고, 깊이 할수록 겸손해져야 하는데, 기고만장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기도가 자기만족 기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눅18:).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아무리 자신이 이렇게 살았다고 한들 자기 입으로 할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다. 또한 감사의 모양을 띠고 있으나, 실상은 타인의 불행이나 부족함과 자신을 비교하며 은연중에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형태다. 소위 비교 우위를 확인하는 감사기도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확증을 얻기 위한 독백에 가까운 기도다.
가증한 기도가 되지 않으려면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다. 그래서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기도의 실패는 영적 생활의 실패’라고 말한다. 흔히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대화)로 정의하는데, 이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호흡이 멈추면 육신이 죽듯, 기도가 멈추면 영적 생명력과 감수성도 죽게 된다. 또한 대화가 단절되면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기도가 무너진 자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대신 자신의 경험, 지혜, 힘으로 채워지게 되고, 이는 영적 교만과 무능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기도가 가증하게 여겨지는 기도가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가증한 기도가 되지 않으려면 잘 듣는 거룩한 귀를 가진 말씀에 ‘경청하는’ 기도여야 한다.
경청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바램이나 요구를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말씀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힘쓰는 기도 방식이다. 기도의 주도권을 내 요구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두는 정돈되고 깊이 있는 기도다. 이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침묵과 정돈이다. 내 생각과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 이 시간 저의 소리와 세상의 소리를 잠잠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제 마음에 하시는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둘째,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것이다. 기도의 시작 단계에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응답과 결단이다. 깨달은 말씀에 따라 내 삶을 돌이키고, 순종할 부분을 결단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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