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름에는 약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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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6-09-13 12:32본문
배부름에는 약도 없다.
잠27:7
2026. 9/13 11:00(성령강림 후 열여섯 번째 주일)
현대인의 치명적인 질병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 있었다. 온갖 진귀한 요리가 매일 왕의 식탁을 채웠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왕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모래를 씹는 것 같았고,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왕은 늘 신경질적이었고, 걸핏하면 격노하여 주변을 떨게 만들었다. 의원들을 불러 모았지만 아무도 그 원인을 찾지 못했다. 어느 해 극심한 흉년으로 굶어 죽은 사람이 늘어나자, 백성의 삶을 살피려고 왕은 변복하고 궁궐을 나섰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어느 산골 마을이었다. 마을 전체가 쫄쫄 굶다시피 하고 있었다.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어느 오두막에서 백발노인이 풀죽 한 그릇을 끓여 손자에게 건네고 있었다. 손자는 그 거칠고 투박한 풀죽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만찬을 대하듯 감사하며 떠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병 원인을 깨달았다. 그것은 음식 문제가 아니라, 배부름이 문제였다. 소위 ‘풍요병’(Affluenza)이다. 너무 잘 먹고 편안하고 배가 불러서 생긴 병이었다. 즉,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고 감사를 잃어버려서 생긴 병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 편에서는 굶주린 사람이 아직도 많지만,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먹을 것도 많고, 볼거리도 많고, 즐길 거리도 많다. 모든 것이 넘쳐난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그렇다. 배고파 죽겠다는 말 대신 배불러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시대다. 이렇게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으나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고 정신적 공허함은 더욱 커졌다. 만족보다는 불만이 더 팽배하고,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깊어졌다. 분명히 전보다는 모든 것이 훨씬 좋아졌는데,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박탈감과 우울감이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이 풍요병이 영적 생활에도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위 이야기에 나온 왕처럼 풍요병의 무서운 증상은 ‘삶의 미각 마비’다. 본문은 이를 무척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7). 배가 부르면 맛있는 음식도 어떤 맛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성도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복음을 늘 듣는 뻔한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 곧 영적 배부름이 가져다준 영적 ‘미각’ 상실때문이다.
풍요병의 처방
그러면 어떻게 잃어버린 미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위 이야기에 나온 가난한 집 아이처럼 풀죽 한 그릇도 마치 황홀한 성찬처럼 여기면서 감사하며 먹을 수 있을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각을 치유하는 방법이 나온다. 그 방법은 더 많은 것을 채워주어 고치지 않고, 오히려 그 배부른 자아를 깨뜨리시고 ‘주린’(르에바רְעֵבָה) 상태로 이끄신다. 즉, 인생의 광야를 만나게 하시고, 갈증(차마צָמָא)과 주림의 상황(인간이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대적인 영적 허기를 뜻함)을 허락하신다. 배가 고파야 밥의 귀함을 알고, 목이 말라야 물의 생명력을 알기 때문이다. 영혼이 바닥을 치고 간절해질 때, 비로소 말씀 한 구절이 꿀처럼 달콤하게 다가오고, 찬양 한 소절이 마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또한 절박하게 부르짖게 된다. 영적 간절함과 절실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영적 미각이 살아난다. 풍요병에 걸린 사람은 작은 쓴소리나 가벼운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고 불평한다.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영혼이 주린 사람은 다르다.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7b). 나를 살리기 위한 보약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쓴맛조차 단맛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은혜의 역설이다. 살면서 때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적 미각을 회복시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절실한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을 탐험하던 한 탐험 가이드가 쓴 수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행 중 한 부유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가방 속에 최고급 와인과 달콤한 음료수를 가득 채우고 출발했다. 사막을 걸으며 목이 마르면 그 음료수를 마시며 콧소리를 냈다. ‘사막이라도 돈만 있으면 아쉬울 게 없지.’ 그러나 며칠이 지나 사막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폭염에 땀을 쏟았고, 결국 준비한 음료수마저 바닥이 났다. 그때부터 그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고 숨을 쉴 때마다 모래가 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버티다 탈진해 쓰러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현지 안내인이 다가와 그의 입에 허름한 가죽 부대에 담긴 미지근하고 흙먼지가 섞인 맹물 한 모금을 넣어주었다. 부자에게 그 물은 최고급 와인과 비교할 수 없는, 아니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단물이었다. 그는 그 흙탕물 같은 물을 마시며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있음에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그렇다. 세상의 쾌적함과 자기만족으로 배부른 사람에게는 주의 은혜가 평범한 맹물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훈련의 쓴맛이 원망스럽게 다가온다. 예배의 자리가 감격스럽지 않고, 설교가 지루하고, 기도가 귀찮아진다. 이것이 바로 영적 ‘소베아שָׂבֵעַ’(배부름) 상태다. 영혼이 교만으로 배부르면 꿀송이 같은 은혜의 말씀이 더 이상 달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영적 활동들이 귀찮고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나 영혼이 바닥을 치고 처절한 ‘주림’(רְעֵבָה)을 느낄 때,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유일한 호흡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예배 한 시간이, 찬양 한 소절이,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이 영혼을 살리는 꿀처럼 단 생명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영적 갈급함은 인생의 쓴 고난도 단맛으로 바꾼다. 절실한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안다. 결핍이 없으면 가치도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것을 담을 빈자리가 없으면 도리어 짐이 되거나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관계도 비슷해서, 간절함이나 필요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리 좋은 말이 오가도 울림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도 종교도 비움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풍요병을 벗어나려면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배부른 자아를 깨뜨려 주린(רְעֵבָה) 상태로 이끄시는 것은 비상 수단이다. 대신 우리가 스스로 영적 ‘주림’(갈증)를 가지고 영적 ‘미각’(טַעַם)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영적 미각을 회복하고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구체적인 실천적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선, 수시로 의도적인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일상에 매몰되어 타성에 젖어(반복되는 루틴) 살다 보면, 마음의 결이 닳아 없어지고, 사소한 것에서 느끼던 감동이나 성찰의 여유를 잃게 된다. 즉, 영적 감수성이 무디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감수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일상에 작은 틈새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잠시 멈추고 침묵 속에 머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고 내면에만 집중할 때, 무뎌졌던 영적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적 미각이 회복된다.
다음은, 영적 호흡인 ‘기도’다. 바쁘다는 뜻의 한자는 ‘망’(忙)이다. 이 글자는 마음 ‘심’(心)와 죽을 ‘망’(亡) 자로 되어 있다. 바쁘면 마음이 죽는다는 뜻이다. 사실이 그렇다. 너무 바쁘면 우리 안의 소중한 것들이 죽어가게 된다. 마음의 불이 꺼지면 일상도 활기를 잃고 무채색으로 변해버린다. 특히 영적으로 예배가 죽고, 기도가 죽고, 찬양이 죽게 된다. 영적인 활동이 죽게 된다. 영적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깨어나려면 앞에서 말한 대로 일상에 작은 틈새를 가져야 한다.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의 시간을 기도로 채우는 것이다. 기도는 죽어가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적 호흡이다. 기도하면 꺼져가던 마음의 불이 켜지게 된다. 그래서 영적 감수성이 깨어나 영적 미각이 회복된다. 망
그 다음은, 작은 것에 대한 ‘감사’의 연습이다. 풍요로움에 익숙해지면 당연한 것들이 늘어나고, 당연한 것들이 늘어나면 은혜나 일상의 기쁨을 느끼는 감각(영적 감수성)이 마비된다. 그러니 매일 밤 자리에 누워 그날그날 누렸던 사소한 것(시원한 물 한 잔, 스쳐 지나간 좋은 바람, 누군가의 친절 한 마디)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는 영적 감수성을 높여주는 가장 확실한 비타민이다.
끝으로, ‘나눔’과 타인을 향한 연결이다. 영적 풍요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이 갇혀 있을 때 더 깊어지는 병이다. 내면의 에너지가 채워지기만 하고 흘러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병의 원인을 같이 생각한다. ‘불통즉통(不通則痛), 통즉불통(通則不痛)!’ 무엇이든 고이거나 정체가 되면 썩고 냄새가 난다. 병이 생긴다. 반면 나누고 흘려보내면 더욱 풍성하게 살아나고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깊은 활력과 충만함을 되찾게 된다.
물질적·환경적 풍요 속에서 오히려 영혼의 공허함, 무기력, 혹은 감각의 마비(영적 무감각)를 느끼는 상태를 흔히 ‘영적 풍요병’(또는 영적 소진·무감각)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채워져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내면의 생명력은 메말라가는 가는 현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치료법은 ‘더 많은 것의 추구’가 아니라, 소음을 끄고(침묵), 내면을 정직하게 살피며(기도), 당연한 것도 감사하고(감사),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나눔)’이라는 단순한 진리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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