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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부르는 짐,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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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6회 작성일 25-01-1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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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부르는 짐, ‘주일예배

58:13~14

2025. 1/12 11:00

소홀해지는 예배생활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의 부흥과 침체의 원인 중 하나로 예배’(특히 주일예배)를 꼽고 있다. 예배에 목숨을 걸고 예배생활을 할 때는 교회의 부흥이 들불처럼 일어났는데예배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면서 교회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전, 어느 단체에서 조사한 결과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320여 명의 성도를 대상으로 주일예배 실태를 조사했는데, 결석하지 않음 29.1%, 자주 결석함 34.7%, 조금 결석함 34.4%로 나왔다예배생활을 철저하게 하지 않는 경우가 69.1%로 전체 2/3를 상회했다. 그리고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이유로 영적 침체 13.6%, 애경사 20%, 학업 및 경제활동 19.2%, 가족과 함께함 14%, 여가 및 취미생활 33.2%로 나왔다. 가족과 함께, 여가 및 취미생활로 예배를 드리지 못한 비율이 47.2%였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가족이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면 예배에 빠진다는 참으로 우울하고 안타까운 결과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태를 더욱 가속화시킨 사건이 바로 코로나 유행병이다. 지금이야말로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를 죽이고 싶으면 주일을 폐지시키면 된다.’

 

예배의 중요성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도둑질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심각한 죄일까? 아마 대부분은 도둑질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렇게 세속적인 관점과 성경적인 관점이 다르다. 물론 십계명은 둘 다 언급하고 있다. 도둑질은 8계명이고, 안식일(주일)4계명이다. 그런데 두 계명을 어긴 사람에게 주어진 처벌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도둑질은 배상하라(22:1-4)고 했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죽이라고 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31:14-15, 이는 민15:32~36사건 이후에 주어진 말씀). 죽이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둑질은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이지만 안식일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고, 또한 하나님이 친히 가장 먼저 지키셨다(2:2). 이후 십계명으로 법제화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십계명이 출20장과 신5장에 나오는데,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사건’(창조)과 관련하여 안식일을 말씀하고 있고, 신명기에서는 출애굽 사건’(구원)을 첨가하여 말씀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안식일은 성경의 핵심주제인 창조와 구원을 모두 아우르는 계명이다. 사실 십계명의 핵심은 4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충실하게 지킨다는 것은 이미 1~3계명(하나님 사랑)을 지키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5~10계명에 이르는 사람에 대한 도리(이웃사랑)도 잘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율법준수(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안식일을 강조하고 있다. 이 안식일이 신약시대에 이르러 주일예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니 예배, 곧 주일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성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신앙생활에서 예배가 생명이라면 주일예배는 영적 마지노선이다주일예배가 무너지면 성도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종국에는 신앙도 무너진다. 물론 교회 공동체도 유지될 수가 없다. 교회역사가들은 기독교가 지난 2천 동안 많은 박해에도 신앙을 지키며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열심히 모여 예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주일예배를 사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예배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성도인지 아닌지, 그리고 성숙한 성도인지 그렇지 않은 성도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체성도 예배로 결정이 된다. 교회를 예배당(예배하는 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기나 외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바벨론 포로(BC 587) 이후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강대국(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거의 2천년이 지나 1948년에 다시 나라를 세웠다. 그러기까지 그들은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동안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나라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기적이라고 말한다. 많은 연구가들은 안식일 준수가 그 비결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꼭 회당을 세웠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안식일이면 그곳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웠다. 그 결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켰고,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래서 안식일이 그들을 지켰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지복(至福)에 이르게 한다.

본문은 안식일 준수의 의미와 복에 대한 말씀이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고(13), 이렇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셨다(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여기서 세 가지의 복을 말씀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즐거움을 얻다.’(아나그ענג)물질, 명예, 기타 유익한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해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뜻한다. 어떤 어려움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통해 기쁨을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즐거움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 즐거움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복’(眞福=至福)이다. 지복(至福)이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즐거움이다. 이 복을 누리면 다른 지엽적인 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주일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이 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필라델피아의 백만장자였던 스티븐 지라드가 어느 주말에 직원들에게 주일날 출근해서 선박의 짐을 내리라고 했다. 그러자 한 청년이 당황한 모습으로 지라드에게 말했다. ‘사장님, 저는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와는 헤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비록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지만 주일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경리계로 가보게. 그동안 일한 급료를 계산해 줄 걸세.’ 청년은 이 일 후 3주 동안 발이 아프도록 일자리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은행장이 지라드에게 연락해 새로운 은행을 하나 열어야겠는데,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지라드는 해고한 청년을 추천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 청년을 해고하지 않았나.’ ‘물론 그랬지. 그가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해고했네.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자기 신념과 원리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야 은행의 돈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그 청년은 지라드의 추천으로 은행에 채용되었고, 전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물론 흔치 않는 이야기이지만 예배를 통해 즐거움을 얻은 사례이다.

 

1등 하나님, 1등 인생

예배생활, 특히 주일예배는 단순히 어느 특정한 날을 기억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 이상의 의미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자세)의 문제다13절에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의 문제이고, 하나님을 삶의 ‘0’순위 혹은 ‘1’순위에 두는 삶의 우선순위 문제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삶의 1번인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 예배하는 시간, 예배하는 장소, 곧 예배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내게 하나님은 3이란 글이 있다.

 

내게 하나님은 3등입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2등은 해야 하는 일

3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

어쩐지 우리 이야기 같지 않는가? 예배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다 마치고 여유가 있으면 하는 일이 아니다예배는 하나님을 1등으로 모시는 일이고, 또한 1등으로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1등이 되실 때 우리 또한 1등 인생이 된다예배는 이런 삶에 대한 훈련이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2025년도에 예배생활에 집중하여 하나님이 우리 삶의 1등이 되도록 하자! 사실 지속적으로 예배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시간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드려야 하고, 정성과 열정도 드려야 한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무거운 짐이다. 앞에서 소개한 이야기의 청년처럼 예배 때문에 때론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왜 이 일에 헌신하고, 또 집중해야 하는가? 힘들지만 왜 이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 이것이 단순히’ 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을 부르는’ 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짐이지만 그냥 짐이 아니라 복을 부르는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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