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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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3회 작성일 24-12-29 14:43본문
혼자 가는 먼 길
신1:28~33
2024. 12/29 11:00(송년주일)
반성과 성찰의 삶
반성과 성찰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인간은 이를 통해 더욱 성숙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반성과 성찰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한 것이다. 사람다운 삶은 이를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변화가 없는데, 인간의 세계는 끝없이 변화를 거듭해왔다. 바로 이 때문이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고 했다. 황혼은 하루의 모든 일이 끝난 시간이다. 온갖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하루를 접은 때 이성의 올빼미가 낮고 조용히 날면서 하루를 반성하고 헤아려보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지성의 역할이다. 즉,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철저한 사람이 지성인이라는 뜻이다. 좋은 신앙이라는 것도 다름 아니다. 반성과 성찰이 깊은 것이다. 바울이 신앙적인 반성과 성찰을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고후13:5). 오늘은 2024년도 마지막 주일이다. 모쪼록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명기라는 책은 모세가 가나안 입국을 앞에 두고 모압 평지에서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에게 율법을 설교형태로 가르친 것이다. 모세의 설교는 광야 40년 생활에 대한 회고(반성과 성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본문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방황했던 사건(12명의 정탐꾼 이야기)에 대한 내용이다(민13:~14:). 여기서 모세의 회고는 백성의 반응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40년을 방황하게 된 것은 불순종의 결과였다(32).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었고, 모세는 광야생활에서 베풀어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 은혜에 힘입어 이곳까지 왔고, 그 은혜를 힘입으면 가나안도 넉넉히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1. ‘먼저 가시는’ 하나님(30,33)
많은 성도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나의 등 뒤에서〉라는 찬양이 있다. 등 뒤에서 잔잔하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찬양이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나의 등 뒤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의 앞에 계시는 분’, 내 뒤에서 따라오시는 분이 아니라 ‘나보다 먼저 가시는 분’이라고 한다. 뒤에서 지켜보며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는 정도의 소극적인 분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앞서 가시면서 준비하고,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분이다(33). 이를 ‘여호와 이레’라고 한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처음 가는 길도 지도나 표지판이 있으면 찾아갈 수가 있다. 요즘엔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길을 찾기가 더욱 수월해 졌다. 그렇지만 네비게이션도 도로가 자꾸 변하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업그레이드시키지 않으면 해맬 수가 있다. 그런데 가장 쉽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하게 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 길을 잘 아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레스트와 같은 위험하고 높은 산을 오를 땐, 그 산을 잘 아는 현지인, ‘세르파’(Sherpa)를 고용해서 올라간다. 등산 전문가라도 세르파가 없이는 절대 등반을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성공할 수도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세르파시다. 주님이 먼저 가시면서 다 준비해놓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40년 광야생활에 대한 모세의 첫 번째 고백이다.
2. ‘싸우시는’ 하나님(30)
흔히 인생을 전투에 비유하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의 문제가 무엇이냐? 싸우는 것이다. 내일의 문제가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모든 날의 문제가 무엇이냐? 죽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승자도 패자도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생은 영원한 패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싸움은 물리적인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실 출애굽여정 자체가 거대한 싸움이었다. 거기에는 이들의 출애굽을 방해하는 적들(이집트, 아말렉, 미디안, 에돔, 모압 등)도 있지만 광야라는 환경도, 목마름도, 배고픔도, 낮의 더위나 밤의 추위도 모두가 싸워야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것 하나 그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지나온 광야를 ‘그 크고 두려운 광야’(신1:19)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성공적으로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우셨기 때문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했다(대하20:15). 이는 하나님이 싸움을 좋아하는 전쟁의 신이라는 뜻이 아니다. ‘내 앞에 있는 적, 내 앞에 있는 어떤 문제보다 하나님은 더 크고 위대한 분이시라.’는 고백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니 그 어떤 적이나 문제도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약하지만 그래서 그 어떤 싸움에서 이길 수 없지만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싸우시니 그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여호와 닛시’라고 한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이것이 40년 광야생활에 대한 모세의 두 번째 고백이다.
3. ‘안으시는’ 하나님(31)
‘죄 경영’(Sin management)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 ‘공포 마케팅’이라고도 한다. 종교를 밥벌이로 이용하는 종교인의 행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죄와 형벌’이라는 도식으로 사람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고,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마치 사찰의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처럼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은 ‘아빠’(Abba) 아버지시다. 우리의 약함과 허물까지도 다 덮으시고 받아 안으시는 분이시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다(42:3).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31). 이는 광야 40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부모가 어린 자녀를 품에 안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이스라엘을 안으셨다는 것이다. 광야는 결핍의 장소다. 그곳엔 길도 없고,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쉴만한 그늘도 없다. 반면 광야는 위험한 장소다. 도적이 출몰하고, 사나운 짐승,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너무 커서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춥다. 그러므로 광야는 누군가의 보호와 인도,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신 것이다.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고.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고 인도하며 돌보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를 모세는 한 마디로 ‘안아주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사46:3,4 참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안고 업고 가나안 문턱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40년 광야생활에 대한 모세의 세 번째 고백이다.
혼자가 아니다.
권태주 시인의 「혼자 가는 먼 길」이란 시가 있다. 우리 인생이 곧 ‘혼자 가는 먼 길’인 것 같다. 이와 같이 혼자 가는 먼 길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거나 손을 잡아주면 새로운 힘이 차오를 것이다. 사실 곁에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도 그렇다. 그러니 누군가 곁에 함께 있어준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은 없다. 다음은 이 시의 일부다.
지금은 깎아지른 절벽 길을 맨발로 걷고
빙하 아래 차가운 심해를 헤엄쳐 나가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리
혼자 가는 먼 길
그 길의 끝에 나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을
사랑하는 그대가 있으니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살면서 폭우와 눈사태를 만나기도 한다. 때론 깎아지른 절벽 길을 맨발로 걷고, 차갑디 차가운 깊은 바다를 헤엄쳐야 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며 한 생애를 만들어 간다. 이 험난하고 어두운 길을 정말 아무도 없이 홀로 걸어가야 한다면 희망이란 단어는 ‘죽은’ 희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혼자 걷는 먼 길 끝에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참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비록 혼자 먼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그 끝에 ‘사랑하는 이’가 있어 지치고 힘들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혼자 가는 먼 길은 혼자가 아닌 ‘함께’임을 알 수 있다. 시인에게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겐 분명하다.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가 걷는 길 끝에 우리 주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다. 본문에 의하면 주님은 그 이상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먼저 준비하시고, 모든 적과 힘든 환경을 이기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업고 안고 가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2024년도를 잘 살아왔고, 다가오는 2025년도도 여전히 그렇게 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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