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시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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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233회 작성일 24-03-24 13:43본문
사랑하시되 끝까지
요13:1~11
2024. 3/24(종려주일). 11:00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본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도 그렇고, 이런 행동에 대한 본서 저자의 평가도 그렇다. 본문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에 대한 본서의 저자는 주님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주님 사랑의 위대함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상황의 영향으로 중간 중간 비어있는 점과 같은 사랑이 아니라 선처럼 끝까지 이어지는 사랑이다. 때가 다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육신의 엄청난 고통이 엄습할 것을 아심에도, 자신을 팔 사람이 자신의 제자 누구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보여주셨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사랑하시니라.’ 이는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특히 ‘끝까지’ 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일회적으로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 ‘끝까지’는 헬라어로 ‘에이스 텔로스’(εἰς τέλος)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주님 사랑의 ‘무한성’, 혹은 ‘영원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은 이를 ‘to the very end’로 번역하고 있다. 최후의 ‘바로 그’(the very) 끝을 말한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갖 수모와 저주, 고통을 당하며 죽으신 그 순간까지를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엇이든 ‘끝까지’ 못한다. 그래서 상황이 악화되면 내 코가 석잔데 나부터 살고 봐야하지 않겠냐고 항변하고,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최후의 바로 그 끝, 곧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다른 하나는, 주님 사랑의 ‘완전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또 다른 영어성경은 ‘full extent of his love’로 번역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사랑하는 완벽하고 완전한 사랑을 의미한다(13장~17장에 잘 나타남). 이와 같은 주님 사랑의 ‘무한성’과 ‘완전성’은 주님이 우리 인생 전체를 책임지시며, 그 책임의 한계는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몽땅 책임져주신 사랑,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마지막 식사도중에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소위 ‘세족식’의 모습도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왜’(Why) 그렇게 사랑하신 것인가?
주님은 ‘끝’(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왜 그렇게 사랑하신 것일까? 답은 어떤 조건이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신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지금 제자들은 몹시 불편한 관계에서 주님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누가 크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주님께서 이번 예루살렘 방문에서 왕이 되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주님은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데, 왕이 되기 위한 방문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된 요청을 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같은 욕심을 품고 있었던 다른 제자들을 자극하여 상황이 험악해진 것이다. 그들의 이런 불편한 심기는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손발을 씻는 결례도 무시하게 되었고, 스승이신 주님께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식사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세족식을 행하게 된 것이다. 주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은 그들을 주님께서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도 아셨고, 베드로의 부인도 아셨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도망칠 것을 다 아셨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이 없는 데도 이렇게 사랑하신 것이다.
인간의 사랑에는 조건이 있지만, 주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를 사랑할만한 이유가 조금도 없다. 주님은 거룩하신데 우리는 거룩하지 못하고, 주님은 의로우신데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 주님은 사랑이신데 우리는 미움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다. 이런 우리를 먼저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고, 바울도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주님의 사랑은 이유도 조건도 없이 거저 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주님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이 사랑 때문에 여러 가지로 못난 제자들이 제자의 자리를 지키게 된 것이고, 오늘의 우리도 있는 것이다.
‘누구’(Who)를 사랑하신 것인가?
그동안 주님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본문은 주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보이신 행동이고 또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에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한 대상이 나온다. ‘자기 사람들’이다. 자기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할까? 일차적으로는 주님이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주님과 꼭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보려고 무척 애를 쓰셨던 12제자이고, 그들과 함께 동거했던 수십 명의 제자를 가리킨다. 보다 넓게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요17장에서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2,6)이라고 말씀한다. 엡1: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신 자들’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자기 사람들이란 믿는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이는 자기 것에 대한 주님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물론 주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리고 세상의 구주로 오셨으니까 모든 세상 사람을 다 사랑하신다. 이를 포괄적 사랑이라고 한다. 동시에 주님은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다. 자기 사람에 대한 사랑이 독특하고 특별하다. 아주 독점적인 사랑이다. 성경에 이와 같은 사랑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너는 내 것이라.’(사43:1).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49:16) 등등. 이와 같은 사랑을 근거로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주님은 자기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신다. 그들이 곧 우리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바울처럼 이런 확신의 고백을 드리자!
양파와 같은 사람
겉 색깔이나 속 색깔이 같은 과일과 채소가 있다. 모과, 무, 당근 등이 그렇다. 겉과 속이 같은 맛을 내는 채소가 있다. 토마토가 그러하다. 양파는 겉과 속이 같은 색깔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맛이다. 사람도 양파와 같은 사람이 있다. 겉과 속이 한결같고,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사람이 있다. 나무가 그렇다. 나무는 한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말라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어느 한 순간 반짝 빛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랫동안 꾸준하게 빛나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빛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좋은 커피는 첫 맛이나 끝 맛이 같다. 1월이나 6월이나 12월이나 그 맛이 변치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끝까지 그 신실함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나무처럼 양파처럼 한결같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서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마음,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개척을 하면서 늘 드렸던 기도 중에 하나가 함께 시작한 사람들과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기도는 온전히 응답되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헤어진 사람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내 사랑과 마음의 그릇이 작아서 끝까지 사랑으로 품지 못해 헤어진 경우도 있고, 상대방이 거부해서 헤어진 경우도 있다. 물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간사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의 한계에 자주 자책하며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완전하다. 모두를 끝까지 품는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서 주님과 끝까지, 몸인 교회와 끝까지,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그래서 우리도 우리 주님처럼 속과 겉이 한결같은 양파와 같은 사람,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jENpuVYkPfQ 1205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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