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어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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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45회 작성일 24-02-25 13:22본문
주님, 어서 오십시오!
벧후3:8~13
2024. 2/25(사순절 둘째 주일). 11:00
주님의 재림이 성도의 삶에 미친 영향
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많다. 학자들은 수백 개(약 450개)가 된다고 말한다. 지난 14일부터 10여 일간 말씀쓰기가 예수님에 대한 약속과 성취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 하나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종종 언급하셨고, 특히 승천하실 때 천사가 증언한 주님의 ‘재림’이다. ‘이르되 갈릴릴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재림은 주님에 대한 예언 중에 성취되지 않는 유일한 예언이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은 핍박 중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에게 큰 위로였고, 또한 소망이었다. 심지어 재림과 관련하여 인사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마라나타!’가 바로 그것이다. 초기에는 ‘주님 곧 오십니다!’ 라는 선언적인 뜻이었는데, 후에는 ‘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는 청원의 뜻으로 사용이 되었다.
아무튼 주님의 재림은 성도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성경기록이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1세기가 되어서야 주님의 삶과 사역을 보여주는 복음서가 기록되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주님의 재림과 관련이 깊다. 초대교회 성도는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곧 ‘임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아직 그들에게는 주님의 삶과 사역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가 살아있어 그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게다가 주님께서 곧 오시는데 굳이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필요성을 못 가진 것이다. 그런데 곧 오신다고 하셨던 주님은 오시지 않고, 목격자도 하나 둘 죽어갔다. 이런 위기감이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여 복음서가 기록되었다. 신약성서 기록의 지연과 동기가 재림과 관련이 깊다는 이야기다. 특히 데살로니가교회는 재림과 관련하여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재림이 당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오늘 본문도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내용이다.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은
본문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 조롱하는 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다. 본문 앞부분은 재림의 약속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만물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기에 종말은 없다고 주장했다(3,4). 이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위 ‘자연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천지창조나 노아홍수 때 경험했던 물의 격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의도적으로 망각한데서 기인한 것이다(5,6). 그러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심판 때에도 말씀으로 땅과 하늘을 불태우실 것이라고 말한다(7).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재림,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약속이 속히 이뤄지지 않고 더디냐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시간에 대한 인식차이
그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시간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일을 금방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뒤에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왕왕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후사에 대한 약속이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은 25년 후에 성취되었다. 노아에게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고 나서 무려 120년 후에 그 일이 시행되었다. 우리와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8).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카이로스Καιρός, 사건이 이루어지는 때로서의 시간)에서 천 년인지 하루인지의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니 주님의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물리적인 ‘시간’(크로노스χρόνος, 혹은 연대기적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재림의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재림의 때가 더딘 것 같지만 주님은 하나님이 뜻하신 시간(Καιρός)에 반드시 오신다.
잘 아는 하루살이와 메뚜기이야기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온 종일 놀다가 헤어질 때 메뚜기가 말했다. ‘내일 보자!’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지?’ 라고 했다. 다음날 메뚜기는 하루살이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고 혼자서 외롭게 놀고 있을 때 개구리가 와서 놀아주었다. 헤어질 때 개구리가 말했다. ‘내년에 또 만나…’ 그러나 메뚜기는 ‘내년이 뭐지?’ 라고 했다. 시간에 대한 인식차이를 잘 보여주는 우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했다. 주님께서 곧 오시겠다고 하신 후 2천년이 흘렀으나 주님의 시간으로 이틀이 지난 것일 수도 있다.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치고, 무디어진 것이다. 주님께서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우리의 관점이나 이해, 시간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사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이뤄진다. 이를 기다리지 못한 결과가 오늘날 중동문제의 근원인 이스마엘의 탄생이고, 교회사에서 수많은 이단이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생겨났는데, 대부분이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 시간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참고 기다리심
주님께서 더디 오신 또 다른 이유는,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신 것이다.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인식을 모르시겠는가? 아시고도 서두르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은혜의 시간을 마감하시기가 어려운 것이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많은데, 시간이 임박하여 그 문을 닫는다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인 것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한 것을 가나안 족속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가나안을 멸망시키겠다고 선포하시고 나서 430년이라는 시간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거기다가 또 40년을 더 주셨다. 원수라도 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좋아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모두가 회개하고, 모두가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더디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 앞부분에서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은혜가 있어 오늘의 내가 있고, 여러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1992년 10월에 큰 소동을 일으켰던 다미선교회의 사건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끝장내셨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50년 전, 100년 전에 끝장내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으시며 기다려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더디 오신 중요한 이유다. 빨리 달려서 먼저 도착한다고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더딜지라도 자기를 돌아보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인생의 성공이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조급하다. 더딤이 은혜다. 기도 응답이 늦는 것도 은혜다. 문제가 속히 해결되지 않는 것도 은혜다. 빠른 것이 결코 복이 아니다. 빨리 되는 것이 은혜도 아니고, 형통도 아니다. 더딤이 은혜일 수 있다. 빠름보다 늦음이 복일 수 있다.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은혜를 깊이 헤아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 같지만 ‘갑작스럽게’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도둑같이 오리니....’(10a).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셔서 이전 세상을 뒤엎고(10b,12b), 약속대로 그의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13). 그러니 이와 같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여기서 베드로는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다. ‘그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라는 말씀이 그 의미다. 도둑은 예기치 않은 때에 오기에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막을 수가 있다. 주님의 재림도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며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라.’(11b,12a).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면서 주님의 재림을 바라며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라보다.’(looking forward)는 바라고, 기대하고, 고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은 ‘서두르다.’, ‘재촉하다.’는 뜻이다. 즉, 주님의 재림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재촉하여 빨리 오도록 하라는 의미다. 막연히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성도는 주님의 재림에 모든 것을 걸고, 깨어서 준비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고 오실 주님을 기대하고 사모해야 한다. 학수고대해야 한다. 빨리오시도록 재촉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다. 무엇보다도 우리 세대에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jGXec0ywj2s 1229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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